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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여성위인 전집을 꿈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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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여성위인 전집을 꿈구며

입력
2000.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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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딸아이는 요즈음 위인전에 관심이 많다. 늘상 아기인 것만 같았는데 이제 서서히 자신의 역할모델을 찾아가는구나하고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우리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딸아이는 유독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여자 위인전을 읽고 싶어하는데, 집에 있는 만화 위인전과 위인 전기집을 총동원해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되지 않는 것이다.

신사임당, 유관순, 헬렌 켈러, 퀴리 부인, 나이팅게일 그리고 용감한 쟌다르크…, 그렇게 전부였다. 나는 가끔 수업시간에 우리 학생들과 함께 ‘여자 위인 찾기’에 나서본다.

학생들이 외울 수 있는 남자 위인은 끝이 없다. 그래서 중단하고, 여자 위인 20명만 찾으면 수업을 일찍 끝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내걸어 본다.

성년이 된 대학생들은 마치 유치원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여자 위인의 이름을 외치다가, 7~8명이 넘어서면 주춤거리기 시작하고 그리고는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미궁을 헤매다가 ‘삼천 궁녀!’라는 외마디로 끝나버린다.

수업은 계속되고, 씁쓸한 기분이 된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여성의 삶과 생애는 여성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최근 여성의 삶을 복원해 내려는 학자들의 관심과 노력이 커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갈피마다 배어 있을 여성의 활동을 조명하기에는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남자의 글과 책 속에 묻혀버린 여성의 목소리와 삶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여성이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섣부른 예견만으로 여성이 훌륭하게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신사임당’만으로 역할모델을 한정하기에는 요즈음의 여자 아이들은 더욱 더 도전적이고 총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적절한 사회적 역할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많은 여자아이들이 수많은 동화 속의 ‘공주들’과 더 빨리 친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환상적인 결혼에 대한 기대 앞에서 자신의 꿈과 소망을 쉽게 접어버리는 여성이 아직 많은 것도 적절한 역할모델의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똑똑해진 공주’만으로는 미래를 여성의 것으로 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 여성에 다가가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지역의 위대한 여성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사는 원주에서는 조선시대에 꽤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설파하고 유고집을 남긴 임윤지당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인근 다른 지역에서는 여성 의병장이었던 윤희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여성의 삶을 불러내야 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승리했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인 것이다.

세계 여성 위인 전집을 만드는 일은 어떨까? 영국 참정권 운동 지도자 팽크허스트, 의사이자 초등 교육의 개척자 마리아 몬테소리,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소유자 허난설헌, 피임 보급에 앞장 선 마가릿 생거,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의 인류학자 마가릿 미드,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였던 마사 그래함, 일제 식민지하의 꿋꿋한 여성노동운동가 강주룡.

위인전집 앞에서 힘겹게 ‘여자위인 찾기’를 하는 작업을 멈추고 이 든든한 버팀목에 기대어 자신의 꿈과 소망을 펼쳐 갈 우리 딸들의 모습을 보고싶다.

강이수·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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