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별세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은 70년 문학인생을 한결같이 인간정신의 아름다움과 순수성, 자유의 고귀함을 추구해온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목이었다.'황고집'이라 불릴 정도로 올곧은 작가정신 하나로 그는 식민과 분단, 전쟁과 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왔다.
그의 타계 소식에 문단 전체가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적 사표가 사라졌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는 처음에는 시인으로 출발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31년 7월 처녀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면서였다.
일본에 유학해서는 이해랑(李海浪) 김동원(金東園) 등과 극예술 연구단체인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기도 한 그는 1936년까지 두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소설을 시의 경지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그의 문장미학은 이 시기의 시 창작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1937년 7월 첫 작품 '거리의 副詞(부사)'를 발표하면서 그는 소설의 세계로 나아갔다.
일제 말기의 혼란된 사회상에서 읽혀지지도 출간되지도 못할 작품을 한글로 쓰면서 그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삭였다.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은 1951년에야 출간된 소설집 '기러기'에 수록됐다.
대부분 아이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우리 전래의 설화에서 모티프를 따 현대소설의 기법으로 정제한 작품들이다.
한국인 정신의 내면적 기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원형(原型)의 제시를 통해 그는 인간존재의 실존적 구원과 신의 절대가치를 탐구하는 문학적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소나기'(1953) 는 완숙의 경지에 이른 그의 단편미학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엎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을 그러안았다.' 현실의 비극성을 배면으로 둔 채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정감적 교류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따뜻한 인간사랑의 정신으로 두고두고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편이다.
이후 '카인의 후예' '일월' '움직이는 성' 등 장편을 통해 그는 보다 현실에 파고 들어가는 문제의식을 보이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낭만적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23년 이상 재직하던 경희대에서 수많은 우리 문학의 인재들을 제자로 배출해 '황순원 사단'으로 불릴 정도의 인맥을 가꾸기도 했던 그는 정년 후 장편 '신들의 주사위'를 발표하고 여든 가까운 나이인 1992년에도 신작 시를 발표하는 등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소설과 시 이외의 일체의 잡문 청탁이나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술원 회원과 경희대 교수직 이외에는, 학교에서 주겠다는 박사 학위마저 거절한 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다.
1996년에는 정부의 문화훈장 수여를 거부하기도 한 그는 최근까지 거의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노환과 싸워왔다.
문우인 미당 서정주 시인은 그의 고희에 '鶴(학)두루미나 두어 마리/ 가끔 내려와 앉아서 쉬는/ 山(산)골길의 落落長松(낙락장송) 같은 그대'라고 칭송했었다.
"소설가는 소설로써만 말할뿐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며 평생 순수문학을 고집했던 그가 '靑山(청산)의 白鶴(백학)'이라고 불리웠던 이유이다.
●연보
▲1915년 평남 대동 출생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지에 발표
▲1934년 평양 숭실중 졸업, 일본 조도전(早稻田) 제2고등학원 입학
▲1939년 조도전대학 영문과 졸업
▲1946년 서울고 교사
▲1957~1980년 경희대 교수ㆍ예술원 회원
▲1985년 '황순원 전집'(전12권) 간행
▲국민훈장 동백장(1970) 3ㆍ1문화상(1966), 대한민국문학상 본상(1983) 등 수상
●주요작품
▲1934년 시집 '방가'
▲1936년 시집 '골동품'
▲1940년 단편집 '늪'
▲1948편 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
▲1950년 장편 '별과 같이 살다'
▲1951년 단편집 '기러기'
▲1952편 단편집 '곡예사'
▲1954년 장편 '카인의 후예'
▲1956년 단편집 '학'
▲1957년 장편 '인간접목'
▲1958편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
▲1960년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4년 단편집 '너와나만의 시간'
▲1973년 장편 '움직이는 성'
▲1976년 단편집 '탈'
▲1982년 장편 '신들의 주사위'
하종오기자 joha@hk.co.kr
■황순원의 문장
우리 말의 무늬와 숨결로 섬세한 글틀을 짠 작가
"다음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속에 손을 담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 하는 꼴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짚었다. 한 발이 물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소나기')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그제야 눈물이 괴었다. 어느새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아이는 지금 자기의 오른쪽 눈에 내려온 별이 돌아간 어머니라고 느끼면서, 그럼 왼쪽 눈에 내려온 별은 죽은 누이가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자 아무래도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눈을 감아 눈 속의 별을 내몰았다." ('별')
■황순원씨가 14일 타계함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사는 또 한 장을 접게 됐다. 우리 소설사의 양대 기둥이라 일컬어졌던 이들이 모두 사망한 것이다.
양대 기둥이라 함은 바로 김동리(金東里ㆍ1913~1995)와 황순원을 이르는 것. 이들은 다 같이 일제시대였던 1930년대 초반에 등단, 평생을 일관하며 순수문학을 추구했던 미학적 장인들이었다.
또한 김동리는 '문예' '현대문학' 추천제도와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교수로, 황순원은 역시 '현대문학' 추천위원과 경희대 교수로 있으면서 각각 현재 우리 문단의 양대 계보라 불릴 정도의 인맥을 키워냈었다.
박경리 최일남 정을병 이문구씨 등이 김동리에 의해 데뷔했고, 전상국 조세희 한수산 정호승씨 등이 황씨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다.
해방과 6ㆍ25 이후까지 활동한 문인들로서는 첫 세대라 할 만한 이들이 모두 떠난 것이다.
시인 쪽에서는 황순원과 동갑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구상(具常ㆍ81) 김춘수(金春洙ㆍ76)씨 등이 활동하고 있지만 2년 전 박두진(朴斗鎭)시인이 청록파 시인 중 마지막으로 세상을 버리는 등, 한 사람 한 사람 현대문학의 산 증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하종오기자
■황순원 추도사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순간 우선 죄책감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4년전이었던가요, 정초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린 이후 한번도 선생님을 뵈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깔끔하시어 자신의 노추를 드러내 보이기 싫다고 은둔생활을 하시던 선생님때문에 찾아뵙기 전에 선생님에게 누가 될 것만 같아 망설이다가 그만 돌아서곤 했습니다.
3넌 전 가을, 다혜가 결혼할 때 사모님이 오셔서 제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아, 괜찮아. 이따금 전화라도 하라구" 하셨지만 어떻게 전화로만 안부인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하여 선생님 정말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저의 스승님에다 아버지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막내 아들과 저는 고등학교때 절친한 친구였으며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할 때 선생님은 심사위원이셨습니다.
조선일보의 신춘문예 당선에서도 선생님은 심사위원이셨으며 제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첫딸을 낳았을 때 선생님께 작명을 부탁드렸더니 선생님은 서슴지 않고 '일월(日月)'에 나오는 다혜(多惠)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주인공 '다혜'가 제 딸 '다혜'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선생님과 저는 같은 평안도 출신의 피난민이었으므로 선생님을 뵈오면 같은 고향 출신이 느낄 수 있는 혈육 같은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이야 우리나라 현대문학에서 최고봉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선생님은 항상 문단에서 초탈해 계셨습니다.
치열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평생동안 잡문 한편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키우는 데에도 엄격하셔서 저는 선생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싶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지만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재데뷔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그것이 제 문학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프라이드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드문 선비이자 문학의 선객(禪客)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셨으므로 말년에는 스스로 세속으로부터 초월하여 은둔생활을 하셨습니다. 틈틈이 사모님의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실 뿐, 세상 일에 스스로 벗어나셔서 숨어 사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을 때마다 저는 과연 선생님답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니요. 일제가 보기 싫어 쓰시는 작품마다 장독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발표하셨다는 선생님의 선비정신처럼 노추를 보이기 싫어 스러져가는 생명을 은둔 속에 묻어 두셨다가 죽음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나타내 보이신 것인가요.
아아, 선생님. 어쨌든 낯선 세상에 오셔서 낯선 문학으로 낯설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선생님. 그리고 아버님. 정말 낯선 세상에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는 별과 함께 사십시오./ 소설가 최인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