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나만의 공간, 가족의 편안한 안식처란 익숙한 관념에 대한 도전. 그것은 근대적 주체의 강고한 버팀목이라 할 '프라이버시의 공간'을 파헤치는 작업이기도 하다.현대판 신성불가침의 영역, 이를테면 욕망의 '소도'라 불릴만한 이 내밀한 사적 공간을 논파한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소명출판 발행)은 그만큼 만만찮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소장 사회학자(연구공간 '너머'연구원) 이진경씨. 1998년 제출했던 박사학위논문을 대폭 수정해 책으로 내놓았다.
책의 논지에 뛰어들기 전에 우선 그의 작업을 통괄해 보는 것이 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요긴할 것 같다.
그의 관심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생산. 그가 늘 말하듯 그것은 '코뮌'이다.
관심의 단순함에 비한다면, 그 '넘어섬'은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넘어야 할 자본주의란 개인의 거의 본능에 가까운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지금 우리가 보는 욕망의 형태는 과연 영구불변한 것일까. 새로운 주체성은 무망한 것일까.
'철학의 탈주' '탈주선 위의 단상들'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 90년대 들어 꾸준히 선보인 그의 근대성에 대한 탐구 역시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셈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개인은 근대의 산물이란 것이다. 그때의 근대란 연속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해온 역사가 아니라 불연속적인 단절을 통해 불쑥 등장한 한 시대를 의미한다.
때문에 개인 역시 불변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조건에 틀 지워진 근대적 주체일뿐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한 시대의 사회적 조건이나 장치가 특수한 형태의 주체를 '생산'해낸다는 것인데, 그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주거공간'이다. 불연속적 역사의 탐색을 통해 인간 본성의 허구적 신화성을 밝히면서 새로운 주체 생산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책의 논지도 이런 맥락 아래서 전개된다. 언뜻 건축학적 외피를 두른 듯 하지만,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근대적 주체 생산의 조건과 그 전복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주거공간의 역사는 사생활의 욕망 등에 의해 사적 공간이 진화해온 것이 아니다.
'가족주의'라는 새로운 욕망의 배치를 통해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에 중간계급의 주거공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성과는 별개로 여전히 근대의 사적 공간은 자유로운 사생활을 보장하는 공간이 아니냐는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답변은 부정적이다. 근대의 사적공간이 보장한 듯한 사생활의 권리는 사생활을 숨겨야 한다는 의무를 동반했다는 것, 그러니까 숨겨야 할 치부의 그늘이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또 환원할 수 없는 욕망을 가족주의적 규범안에 묶어 두면서 새로운 감시체제를 생산했다고 말한다.
이드와 초자아로 분열된 자아, 오디푸스의 죄의식을 논한 정신분석학이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처한 내적 감시체제의 상황을 전하는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거를 서구의 아날학파나 탈근대주의자에게 기댄 점, 우리와는 동떨어진 서구의 역사라는 점 등은 한계이자 넘어야할 과제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