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판계의 최대 화두는 '느림'이다. 5월 해냄에서 '느림의 지혜'가 나온 것을 시작으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6월, 동문선),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7월, 해냄), '느리게 사는 즐거움'(8월, 물푸레)이 연이어 출간됐다. 한 달에 한 권이다.인터넷이 조금만 느려터져도, 지하철이 조금만 연착돼도 안달이 나는 요즘 세대에 왜 하필 '느림'일까.
잔디밭을 맨발로 걷고, 노을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부드럽고 우아하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그 '느림'의 미학이 바쁜 삶에 지친 우리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은 아닐까.
책은 시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이다. 저자 윤중호(44)는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그 역시 주위 사람들로부터 "제발 밥이나 술이나 빨리 먹고 걸음도 빨리 걸었으면 좋겠다"고 핀잔을 듣는 느림의 대가(大家)이다. '금강에서' '본동에 내리는 비' '청산을 부른다' 등의 시집을 낸 시인은 과연 그들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보았을까.
우선 '느리게 사는' 동료 선후배 문인들의 삶이 살갑다. 소설가 이문구는 '뼈대가 큰 편이고 우람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래도 고운 얼굴, 그 얼굴에 비죽이 흐르는 웃음도 참 거시기한' 사람이고, 시인 신경림은 '고향 아저씨처럼 눈을 감고 웃으면 너부죽한 얼굴이 그저 편하게 마구 퍼져서 보는 사람의 얼굴까지 무사태평하게 다림질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일상에서, 술 자리에서 만난 '느리게 살아가는 사부' 13명의 삶의 단편들이 이렇게 묶였다.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느리게 산다. 신경림은 남들이 '다 버리고 떠난 뒤에도 뒤에 남아서 혹시 억울하게 버려진 것이 없나 꼼꼼히 따지고 챙겨주는 뒷설거지꾼의 마음'으로 느리게 산다.
시인 천상병은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사람을 물건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우리나라에서 뻔뻔히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얄팍한 삶이 사실은 개똥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홀연히 떠남'으로써 느리게 살았다.
'글판의 외로운 수도자'로 소개한 소설가 김성동의 일화도 재미있다. 저자와 김성동을 포함해서 문인 4명이 미아리의 한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갔다. 그날은 모두가 몹시 취했다.
그런데 여자 넷이 들어와 인사를 한 다음에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옷을 훌렁 벗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때 '성동이 형님'이 황겁결에 벌떡 일어나더니 흘러내리는 여자의 옷을 다시 끌어올리며 물었다. "오, 옷 벗는 의미가 뭐여?" 바로 엄벙덤벙하니 대충 넘어가는 게 없고 꼬장꼬장하게 사물의 '의미'를 찾는 김성동의 기질때문이었다.
시인은 또한 평범하지만 나름대로 '느림의 미학'을 갖고 살아가는 보통사람 12명도 만나봤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사거리에서 망원동 쪽으로 길게 나 있는 뒷골목. 소위 '합정동 먹자골목'에서 '껍데기집'이라는 선술집을 차린 이덕재(51)씨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술집주인의 웃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너 개밖에 되지 않는 화덕 주위로 항상 손님이 넘쳐나지만 장사보다는 잿밥(술)에 더 눈이 끌리는 주인아저씨의 넉넉한 웃음'. 그런 그이기에 그가 웃을 때면 손님도 웃고, 주인 아주머니도 웃고, 구경꾼도 웃는다.
여기쯤에서 세상살이에 주눅들고 세파에 시린 어깨가 비로서 펴진다. 그 때 마시는 탁주 한 잔.
책은 이처럼 읽는 사람에게 책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눈 앞에 나타나는 그 주인공들의 넉넉하고 여유있는 삶. 시인의 언어로 곱고 정성스럽게 조탁된 그들의 굼뜨고 느린 삶이 우리 눈 앞에 퍼뜩 깨어난다. 기존 번역서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생경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단번에 극복되는 순간이다.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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