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마다 전쟁을 치렀지만 이렇게 끔찍하지는 않았어요.”13일 낮 12시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한모(30)씨는 버스 안에서 보낸 21시간의 ‘귀경악몽’이 생각나는지 여러번 고개를 저었다.
고향인 전남 광양을 찾았던 한씨가 전쟁을 시작한 것은 전날인 오후 1시께.진작 표를 예매했지만 이미 시작된 귀경행렬 때문에 고속버스의 도착이 지연돼 출발부터 2시간이나 늦춰졌다.
돌을 갓 지난 아들을 품에 안은 한씨는 아내에게 “막힐테니 잠이나 푹 자라구”라며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평소 2시간 걸리던 광주 톨게이트까지 4시간이 넘게 걸리자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부근부터 거북걸음을 하던 버스는 결국 출발 6시간만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짜 ‘지옥’은 이때부터였다.
한씨의 아들은 물론 여기저기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어린아이들의 울음보가 터져나와 버스 속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생리현상을 호소하는 데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운전기사는 휴대폰으로 앞차와 몇마디 나누더니 결국 국도로 접어들었고, 출발 8시간만에 처음으로 휴게소에 도착했다.
한씨 가족 등 승객들은 마치 전쟁난민처럼 겨우 끼니를 때우고 따뜻한 물을 얻어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었다.
그뒤에도 고속버스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며 몸살을 했지만 서울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울다 지친 아들을 품에 안은 한씨와 아내도 잠이 스르르 들곤 했지만 1평도 되지 않는 버스 좌석에서 편히 잠이 올 리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어른도 탈진한 사이 버스는 15시간만인 이날 오전 6시께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에 가까스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름만 전용차선일 뿐 엉금엉금 기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터미널에서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한 한씨는 부모님께 도착인사를 드리고서야 악몽에서 해방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씨의 고생은 처음 구입한 자가용을 타고 고향인 전남 여수를 찾았다가 27시간이 넘어서 서울톨게이트에 도착한 김모(29)씨에 비하면 행복한 편이었다.
양정대기자
torch@h.co.kr
■부산→서울 19시간 광주→서울 18시간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3일 사상 최악의 귀경전쟁이 벌어졌다.
이는 추석 다음날인 이 날이 연휴 마지막 날이어서 예년에 비해 귀경기간이 촉박한데다 태풍 ‘사오마이(Saomai)’까지 다가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2일 오후부터 귀경차량이 고속도로와 국도로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빗길 교통사고까지 빈발해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고 일부 지역은 서울까지 24시간 이상 걸리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부산_서울의 경우 이날 오후 승용차로 최대 18시간, 고속버스는 15시간이 소요됐다. 광주_서울은 승용차 18시간, 버스 14시간, 대구_서울은 승용차로 13시간30분이 걸렸다.
여수·남해 등 남해안 도서지역 귀경객들은 서울까지 24시간 이상 걸리는 최악의 교통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도도 우회차량이 몰리면서 1번 국도 오산_수원과 3번 국도 곤지암_성남, 충주_음성_이천 구간 등이 심한 혼잡을 빚었다.
제주도 등 남부지방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면서 이날 도서지역을 연결하는 여객선과 항공기 운항이 잇따라 취소됐고 귀경객과 관광객 수만명의 발이 묶였다.
빗길 교통사고도 잇따라 추석 연휴기간인 9일부터 13일 오전까지 2,700여건이 발생, 80여명이 숨지고 3,000여명이 다쳤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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