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이모(35)씨는 며칠 전부터 배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다 먹었지만, 증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동네의원을 찾았더니 신체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다며 정신과적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명절이 다가오면 정신과에는 주부 환자들이 부쩍 늘어난다. 특별한 질환이 없는데도 머리나 배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며 기운이 없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하며 잠을 자주 설치는 등의 정신적인 증상도 동반된다. '명절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증상이다..
물론 전문적인 의학용어는 아니다. 명절증후군은 전통적인 관습과 현대적인 사회생활이 공존하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즉 핵가족 문화에 익숙한 주부들이 갑자기 대가족에 합류되는 명절을 앞두고 느끼는 여러 가지 육체적, 심리적 증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특히 가사를 남편과 분담해 온 젊은 주부들은 시댁에서의 음식 준비, 동서나 올케에 대한 처신문제 등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 쉽다.
대개 추석이 지나면 증상이 씻은 듯 사라지지만, 일부 여성들은 오히려 추석이 끝난 뒤에 두통과 메스꺼움, 두근거림, 불면증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평소 우울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주부 김모(34o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남자들은 연휴 내내 웃고 떠들며 즐기지만, 여자들은 제수를 준비하고 손님상을 치르느라 어깨와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라며 "주부들이 일년 중 가장 강도 높고 많은 양의 가사노동을 하는 때가 바로 명절"이라고 말했다.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주부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명절이면 더욱 두드러지는 가정 내 성차별. 한국여성민우회가 조사한 여성차별 사례에서도 '명절, 제사상의 성차별'이 1위였다.
김씨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시댁 식구들과 그 조상들을 위해 음식과 차례 상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시부모, 동서, 올케들 간에 생기는 심리적인 갈등, 일과 비용의 분담에서 오는 알력도 만만치 않다.
명절증후군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을지병원 정신과 안영민 교수는 "주부 스스로 적절한 휴식을 자주 취해 먼저 육체적 피로를 줄여야 한다"며 "일을 할 때도 주위 사람들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리적인 부담감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명절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자신만을 위한 여가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의 가족 구조 속에서 주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남편 등 주변의 이해와 세심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아내를 가족간의 대화에 끌어들이거나 주방에서 일을 거드는 등의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명절증후군은 곧 해소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2주 이상 계속된다면 '주부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므로 만성화하지 않도록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맏며느리가 음식 장만을 도맡는 관행도 고쳐야 한다. 남들이 웃고 즐기는 명절에 음식준비와 설거지에 매달리다 보면 피곤해져 짜증이 나기 쉽다.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해 필요한 음식을 조금씩 마련해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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