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전"가난이란 선비에게 일상적인 일이요. 죽음이란 사람의 종말이거늘. 일상에 거하면서 종말을 기다리니 어찌 즐겁지 않겠소?" 산속에서 가야금을 타며 노래 부르던 영계기(榮啓期)를 만난 공자가 물었다.
"무엇이 그토록 즐겁습니까". 이에 영계기가 들려준 말이다. 고사(高士)란 이런 사람이다. 가난을 벗으로 삼고 자연에 파묻혀 죽음마저 초월해 삶의 구경(究竟)을 맛보는 선비, 재야의 은군자(隱君子)이다.
'고사전'(예문서원 발행)은 91명의 은군자 이야기를 담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은일전집(隱逸專集)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황보밀(215~282)이 엮은 이 책은 모두 91조의 짤막한 고사 안에 요(堯) 시대의 피의부터 위(魏) 말의 초선까지 청고(淸高)한 은군자들의 언행과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고사들은 후대에 여러 문인들이 즐겨 사용했고, '후한서'의 '일민열전' 등 정사(正史)에 은일전(隱逸傳)을 따로 두게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고사 중 39조는 저자 자신이 창작한 것이고, 나머지 52조는 '장자' '사기' '논어' 등 여러 책에서 채록했다.
국내에는 고려 때 이미 전래됐고, 한글로는 김장환 연세대 중문과 교수가 이번에 처음 번역했다.
도가의 조종 노자와 장자, 공자의 제자인 안회, 요 임금의 스승인 허유, 굴원을 비판한 어부 등 지금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의 언행은 부귀와 명예에 미혹된 사람에게 놓는 따끔한 침 같다. 요임금의 왕위 계승 한 대목은 어떤가.
요임금이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도망쳐 나와 냇가에 가서 '더럽혀진 귀'를 씻는다.
그를 본 친구 소부는 "어찌하여 그대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의 빛남을 감추지 않았냐" 며 "더러워진 물 때문에 내 송아지 입만 더렵혔다" 고 말한 후 상류로 가버린다. 수천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신선한 충격' 이다.
세상을 피하고 은둔하는 자세가 춘추전국, 한 말, 위진남북조 등 혼란한 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처세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세상 잊고 속 편히 살겠다는 것이다. 공자와 안회의 대화 한 대목을 보자.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왜 벼슬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안회의 대답이 이렇다.
"밭이 있으니 죽을 끓여 먹기에 충분하고, 음악을 연주하니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하고, 선생님께 들은 것을 익히니 스스로 기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벼슬을 하겠습니까." 입신양명을 내세우는 유가적 전통에선 안빈낙도가 지식인의 허약성이나 허무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질문명에 압도된 현대인에겐 날카로운 질문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가난이란 선비에게 늘 있는 것이고 비천함이란 도의 실상이니, 늘 있는 것에 처하고 실상을 얻어 늙어 죽을 때까지 근심하지 않는다면 누가 부귀 때문에 정신을 어지럽히고 해치는 자와 함께 하겠는가" 라고 저자는 적고 있다.
물아, 생사, 귀천을 상보적 관계로 파악하는 도가사상이 현대인에게 던지는 '삶의 실상' 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예문서원 발행, 1만6,000원.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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