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 속 절간의 새벽 종소리는 정신을 맑게 한다. 삼라만상이 잠든 시간에 누렁소 잔등 같은 산등성이를 타고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범종의 긴 여운은 마음 자락을 여미게 한다.서양사학자 조규동(1911~1984) 박사는 한국 범종에 미친 사람이었다.
영국사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서양문화사를 강의했던 그는 한국 문화에서 서양 것보다 뛰어난 게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범종을 발견했다.
1963~66년 사재를 털어 전국 사찰을 다니며 국내 77개 범종을 모두 녹음하고 필름에 담았다.
도로 사정이 나쁘고 변변한 녹음장비도 없던 시절, 녹음ㆍ촬영 장비를 싣고 험한 산길로 다니느라 지프 두 대가 부서졌고 작업 비용을 대느라 집도 팔아가면서 매달렸다.
그 결실이 `신라 범종'이라는 이름으로 신나라뮤직에서 나왔다. 1960년대 LP판을 CD로 복각한 것이다.
그가 녹음해둔 77개 범종소리 중 에밀레종, 상원사 동종, 용주사 대종 등 신라 범종 3종과 천흥사종, 내소사 종 등 고려 범종 6종, 조선 범종 11 개 종의 소리 등 소리가 특히 아름다운 범종 20개의 소리를 골라 담았다.
그 중에는 소리를 잃어버려 다시는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 소리가 있어 더욱 소중하다.
에밀레종은 상태가 나빠서 요즘은 치지 않고, 보신각종은 깨져서 박물관에 들어가 있고(지금의 보신각종은 10여년 전 새로 만든 것이다), 상원사종도 요즘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을 박제한 듯, 녹음한 지 30년이 훨씬 지나 이번 음반에서 만나게 된 범종 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전하는 데 실패한 후손을 꾸짖는 것만 같다.
학자들 중에는 한국 범종이 서양이나 일본, 중국의 종보다 소리와 모양이 아름다워 세계의 으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특히 `우웅우웅' 하고 길게 이어지는 여음은 한국 범종만의 특색이자 음향과학의 승리다.
그 비밀은 종 꼭대기에 붙은 구멍 뚫린 원통 모양 울림통(용통ㆍ甬筒)에 있다. 종 소리는 위로 솟아 용통에 모아졌다가 완만하고 소담스런 범종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종 안쪽을 돌아 멀리 퍼져 나간다.
종 아래 땅에 빈 항아리를 묻어 소리를 빙그르 돌리는 것이나, 종의 어깨 부분 네모난 상자꼴(유곽ㆍ乳廓) 안에 젖꼭지 모양 돌출물(종유ㆍ鐘乳)을 배치해 음향이 튀지 않게 조절하는 것도 한국 범종만의 우수한 특징이다.
이 음반의 20개 범종은 소리가 저마다 다르다. 저음의 느린 울림과 애타게 절규하듯 중심음이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상원사 동종, 장중하고 의연하게 울려 퍼지는 에밀레종, 높고 맑으면서 달콤한 여음의 대흥사 탑산사 종….
조 박사는 범종 소리만 녹음한 게 아니고, 1960년대 전국 사찰과 범종을 담은 영상 필름도 제작했으나, 필름은 분실됐다.
윤보선 대통령 특보를 지냈던 그가 5ㆍ16 이후 정치적 박해를 피해 가족을 떠나 10여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사는 동안 간수를 못해서 그리 됐다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그의 녹음 작업에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보신각 종을 녹음할 때는 통금 지난 시간에 했는데,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는 바람에 경찰서에 부탁해서 반경 200m의 개들을 몽땅 서울운동장에 가뒀고, 집집마다 다니며 아닌 밤중 종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알리기도 했다.
덕수궁 미술관에 전시된 종을 유리 상자에서 꺼내 덕수궁 마당에 매달아 치기도 했다. 윤보선 대통령 특보였던 그의 지위가 도움이 됐다.
어떤 곡절을 거쳤든 그 덕분에 한국 범종의 귀한 소리가 녹음으로 남았으니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이번 음반은 한국 범종의 빼어남을 외국에도 알리기 위해 우리말과 영어로 각각 해설을 녹음해 넣었다. 문의 (02) 921-0390.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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