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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라시아 천년 / (1) 동양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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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라시아 천년 / (1) 동양이란 무엇인가

입력
2000.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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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이란 용어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중국사가 전공이라 그동안 틈만 나면 중국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유럽등 서양을 찾을 기회를 찾지 못했다.

23일간 중국을 넘어 유라시아 지역을 함께 여행하면서 가져간 과제는 동양은 서양과 무엇이 다른가였다.

서양을 보면 동양이라는 개념이 나름으로 잡힐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비록 내가 봉직하고 있는 학과가 동양사학과이고 동아시아(한 중 일과 베트남) 역사를 가르치고 있지만 ‘동양’ 혹은 ‘아시아’란 용어부터 애매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번 답사기간 동안 유라시아대륙을 두 번이나 드나들었다.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유럽에서 저녁을 먹고 보스포러스해협을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10여분만에 아시아에 도착한 후 참르자(소나무)언덕에 올라 홍차를 마시면서 이스탄불 야경을 감상했다.

이처럼 유라시아는 이미 같은 마을이 되어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것은 우랄산맥-카스피해-카프카스산맥-흑해-지중해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그어 만든 분계선이다.

이 분계선의 의미는 이제 거의 상실되었다. 이스탄불이 유라시아에 걸쳐 한 도시를 이루고 있듯이 ‘지구화’가 이미 크게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지리란 인간활동의 출발점이 아니라 산물이다. 동양이란 청대 이전 중국상인들이 필리핀의 루손섬과 인도네시아의 스마트라섬의 주변 해역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현재 ‘동양’이 지칭하는 지역적 범위는 다양하다. 좁게는 동아시아에서 넓게는 비서구권을 가리킨다.

동양이란 지역적 개념의 창안도 제국주의의 조작물이었다. 지리 문화적 실체로서의 동양개념의 조작은 20세기 일본인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들은 근대 일본이 아시아의 최선진국으로서 유럽과 대등한 나라라고 자만했다.

‘아시아문명의 보고(寶庫)’인 일본의 문화는 중국문화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우월하다는 시각에서 나온 패권주의적 개념이 바로 동양이다.

동양이라는 새로운 이념적 공간 속에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의 ‘중국’은 지나(支那)로 격하되어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전통적 중화체제를 해체하고 대신 일본이 중심이 된 새로운 중화체제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잠자고 있는 옛 아시아를 소생시키는 것이 일본의 임무인 동시에 운명’이라는 주장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들의 이런 동양관은 결국 ‘대동아공영권’으로 그 귀결점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오리엔트(Orient)’의 역어로서의 동양의 개념도 역시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라틴어에서 ‘해가 돋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해가 지는 곳’이라는 ‘옥시던트(Occident)’의 대칭어지만 동서의 기준이 된 곳은 서유럽의 기독문화권(Christendom)이었다.

거의 1,000년 동안 아랍과 이슬람이 오리엔트를 대표해왔고 인도와 중국은 제외되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유럽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양을 관리하거나 심지어 동양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동양에 대한 지식체계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여과해서 주입하기 위한 필터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인을 비유럽인 모두와 대치된 것으로 인식하는 집단관념으로 바뀐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문화로부터 동양을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양이 동양화되었다. 그들의 왜곡된 여러 상식에 의하여 동양은 ‘동양적’이라고 인지되었고, 또 동양도 그렇게 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야만적인 국왕의 철저한 독재를 가리키는 말로 서구의 계몽군주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여졌다.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도 정체된 고대농업생산의 답보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구의 자본주의에 대립되어 선전되었다. 이처럼 비학문적 정치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서구인의 ‘동양만들기’에 의해 나타난 두가지 현상은 동양관념의 모호화와 오리엔탈리즘이다. 그것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새뮤얼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에는 세계사는 동구의 몰락으로 국가간 혹은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을 마치고 이제 미래의 갈등단위인 ‘문명’간 대립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에는 중화(Sinic)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8개의 중요 문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 구분의 결정적인 척도를 가치체계, 즉 종교로 잡은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그 가운데 서구와 유교-이슬람은 절대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결국 중화문명권의 핵심국이며 인구 12억의 중국과 코란을 믿는 54개국 12억 인구의 이슬람이 동맹하여 서구 기독교문명권의 핵심국인 미국 유럽과 대결하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이다.

헌팅톤은 이렇게 서구권에 대항하려는 비서구권(오리엔트) 연맹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했지만 사실 중화와 이슬람 문명 사이에 ‘문명적 동맹’을 가능하게 할 공통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간단한 예로 중국이 영내의 소수민족인 이슬람교(회교)도를 견제하고 탄압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동아시아문명권으로부터 일본을 독립시킨 것도 문제다.

이번 여행에서 이스탄불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우리들에게 무척이나 친근하게 대했다. 그들의 서구혐오가 동양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이유라고 여행 가이드는 설명했다. 그러나 모스크로 분장된 이스탄불 시내의 경관은 우리의 것과 너무 달랐다.

러시아는 서구의 일원으로 자처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강압적 권력행사는 중국과 너무 닮아 있었다. 칼 A. 비트포겔이 말한 것처럼 몽고인의 말발굽에 묻혀 전파된 중국적 전제주의의 영향 때문일까?

‘문명의 충돌’에 대한 반명제로 제시된 ‘문명의 공존’의 저자 하랄트 뮐러의 견해도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공존의 해법이란 ‘다양성 가운데의 동일성’의 추구였다. 그는 각 문명의 독자성을 인정하지만 그 동일성이란 바로 서구적 가치로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를 하나의 큰 강에 비유하자면 지구상 각 지역에 존재했던 민족들이 일구어 낸 역사는 그 지류가 될 것이다.

이것을 A. 토인비는 ‘문명’이라 명명하였지만, 서로 유사한 측면을 공유하는 몇 개가 묶어진 보다 큰 권역을 ‘문명권’이라 한다.

유럽에는 서구문화권이 존재해 왔지만, 아시아에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최소 4개의 문명권이 있었다.

아시아에 존재해 온 이들 문명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요소는 그리 많지 않다. 터키는 유럽컵 축구대회에는 참가하지만 유럽국가로 대접을 받고 있지 않다.

지구화가 진전된 지금 인간의 의도된 손에 의해 색칠된 동양 혹은 아시아라는 지역구분이 얼마나 설득력있는 지역개념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동양 혹은 아시아라는 인위적 지역구분의 모호성은 여행 내내 확인됐다. 서구인이나 일본인들이 규정한 동양은 동양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에다 왜곡된 편견과 권력이 담합해서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어떤 모양으로 저마다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며 빛나고 있는 지, 이런 문화와 역사는 앞으로 진정 풍요로운 한마을을 만들어 가는데 어떻게 기여할 지 앞으로 우리 4명의 필자는 차근차근 논의해보고자 한다.

/박한제(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단돈 850원'

아시아에서 유럽에 가는데 드는 비용이 단돈 850원. 터키의 고도(古都) 이스탄불 이야기이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를 공유하는 도시. 해협을 건너는 다리도 2개 있지만 일반인들이 즐겨 이용하는 교통기관은 정기선이다.

오전6시부터 오후10시까지 30분 간격으로 매일 운항하는데 이 배를 한번 타는 삯이 50만 터키리라, 우리 돈으로 850원이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15분 정도. 저녁 무렵에 아시아쪽으로 건너가면 멀리 유럽으로 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유럽쪽은 상업지인 반면 아시아쪽은 주로 주택지라서 정기선은 통근선역할을 한다. 유럽지역의 카바타스에서 출발한 배가 닿는 곳이 아시아지역의 우스크다라.

한때 우리나라에서 장난스런 개사곡으로 알려진, “우스크다라 지데리켄…”으로 시작되는 터키 민요에 나오는 바로 그 지명이다.

오스만투르크 시절, 우스크다라의 세관원이 재상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정기선. 이들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노래가 ‘우스크다라’라고 한다.

보스포러스해협은 그냥도 건널 수 있다. 폭이 넓은 곳은 3.3km나 되지만 좁은 곳은 불과 660m. 수영으로 도전해볼만한 거리이다.

실제로 이스탄불에서는 매년 7월 이곳을 건너는 수영대회가 열린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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