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미 휴스턴에서 열린 세계복싱선수권대회 헤비급 결승. 양 코너에 오른 두 선수의 경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 선수는 이미 92, 96년 두 차례 올림픽을 석권하고 이 대회에서도 무려 5연속 우승한 쿠바의 권투영웅이고 이에 맞설 상대는 정식으로 링에 오른지 겨우 1년밖에 안된 풋내기였다.6년 전 교도소에서 처음 권투를 배울 당시 잽과 스트레이트의 차이점도 몰랐던 이 풋내기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세계최강의 복서를 꺾어보겠다'는 투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생겼다.
백전노장 쿠바선수가 웰터급에 참가한 팀 동료의 경기판정에 불만을 품고 갑자기 기권하는 바람에 풋내기는 졸지에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세계정상에 오른 것이다. 두 선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풋내기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기분이 언짢았고 다음 기회에 꼭 정식으로 세계 일인자를 꺾으리라 다짐했다.
펠릭스 사본(33·쿠바)과 마이클 베네트(29·미국). 당시 승패를 가리지 못했던 두 복서가 이제 1년여 만에 시드니에서 만나 진짜 '최고 주먹'을 가리게 됐다. 이들의 대결은 시드니 올림픽 복싱 최고의 빅카드. 물론 대진이 결정되지 않아 두 선수가 꼭 결승에서 맞붙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무튼 이들의 우승길에는 꼭 한번은 만나게 된다.
올림픽 3연패를 이룬 쿠바의 전설적인 복서 테오필로 스티븐슨의 뒤를 이은 사본은 86년 이후 약 300연승 가까운 무패신화를 창조하며 지난 10년간 아마복싱 헤비급 최정상으로 군림했다. 사본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이 목표"라며 베네트는 안중에 없다는 듯 올림픽 4연패달성 여부가 문제라고 벌써부터 큰 소리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오로지 사본을 꺾겠다"는 의지 하나로 링 위에 땀을 쏟고 있는 베네트의 주먹강도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베네트의 인생역정은 사본의 화려한 경력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사본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할 당시 21세 베네트는 총기를 소지한 채 인형가게를 털다 붙잡혀 26년형을 선고 받았다. 시카고 교도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젊음을 통째로 날려야 하는 비참한 인생이었지만 베네트는 권투와 종교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했다.
항소 뒤15년을 감형받았고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입소 7년 만인 98년 마침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됐다. 불과 출소 1년뒤에 세계선수권을 차지한 베네트는 올해 미국선수권과 미국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도 1위를 차지, 사본과 맞대결을 펼칠 유일한 상대로 평가받는다. 다만 베네트의 걱정 한가지는 범죄 전력으로 인해 호주 당국의 입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
권투 팬들은 시드니 전시홀에서 열리게 될 사본과 베네트의 경기에서 과연 주심이 누구의 손을 들어 올리게 될지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다. 물론 두 선수가 9월 30일 오후 2시(한국시간) 헤비급 결승전에서 맞붙길 기대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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