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경남 통영에서 축구를 시작한 나는 늘 서울에서 축구를 할 수 있는 날을 꿈꾸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듯이 어려서부터 축구를 제법 한다는 소리를 듣던 나 역시 ‘큰 물’에서 솜씨를 뽐내고 싶었다.하지만 교통이나 통신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1950년대의 통영은 서울에서 너무나 먼 곳이었고, 나도 서울 진출은 현실에서 쉽게 이루기 힘든 꿈으로만 생각했다.
통영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1961년 부산 동래고에 진학했다. 서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서 축구를 함으로써 꿈을 절반 정도는 이룬 것 같았다.
당시 동래고는 안종수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기술축구. 아무리 신체조건이 좋고 체력이 좋아도 기술이 떨어지면 이기기 힘들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저 열심히 뛰기만했던 통영의 초등학교, 중학교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여러 형태의 패스, 다양한 슈팅, 조직적인 전술, 상황에 따라 경기를 풀어나가는 요령 등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면서도 잘한다고 과분한 칭찬도, 못한다고 지나친 꾸중도 하지 않은 조용한 스타일이었고 나는 그 스타일이 좋았다. 그는 내게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위치를 바꾸라고 권했고 나는 이를 받아들여 나중에 수비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내가 꿈에 그리던 서울 진출에 성공한 것도 바로 안종수 감독 때문이었다. 1963년 제일모직이 실업팀을 창단했는데 안감독이 그 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나를 스카우트했기 때문이다.
역시 달랐다. 궁정동의 선수단 숙소에는 정원도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연습장도 있었다. 연습장에는 백보드가 설치돼 혼자서도 맘껏 슈팅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공도 선수 한명당 하나씩 사용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수 3명당 하나 꼴이어서 연습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축구화도 마찬가지.
고등학교때는 다 뜯어져 폐기처분할 때까지 신었으나 이제는 언제든 새 것으로 바꿔주었다. 차태성, 조윤옥, 김홍복 등 이름난 선배들과 한 팀에서 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내게 서울은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 풍경이 아니라, 제대로 축구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인지 나는 열심히 운동에 전념해 입단한지 1년도 채 안돼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김 호 프로축구 수원 삼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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