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이 있다. 글자그대로 재앙은 번번이 겹쳐서 온다는 뜻이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당하는 재앙은 그래서 곤혹스럽고, 때론 속수무책일 경우도 많다.집권당 사무부총장의 ‘실언’에서 청와대 행정관의 독직사태에 이르기 까지, 요즘 국민의 정부를 괴롭히고 있는 일련의 악재들이 바로 이런 양상이 아닐까 싶다. 자고나면 꼬리무는 각종 재앙들이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이 정부를 세차게 흔들어대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라는 격찬속에 출범했던 이 정부에게는 일련의 시련들이 가혹할 지 모른다. 그러나 전정부로부터 물려받은 환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공도 빛이 바래고 있다.
또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로 전쟁의 공포로 부터 한반도를 해방시켰다는 세계의 찬사도 무색할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이유는 간명하다. 집권세력이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일시적인 ‘개혁피로’현상이라고 둘러대지만, 실상은 개혁의지의 퇴색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리라 본다.
결과적으로 전정권의 ‘칼국수 개혁’의 이중성에서 이미 낭패감을 경험한 바 있는 국민들은 이제 질척거리고 있는 ‘DJ식 개혁’에도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최근 큰 물의를 빚고 있는 청와대 행정관의 거액 부정대출 사건은 권력의 오만한 실상을 증거하는 좋은 예다. 이 행정관은 친척뻘인 고위관리의 위세를 제멋대로 빌어 1,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불법대출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원칙을 내세워 대출보증을 거부한 신용보증기관 지점장은 ‘멸문지화(滅門之禍)’의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오비이락이라지만, 행정관의 요구를 거절한 이 지점장은 청와대 사직동팀의 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사직동팀이 어떤 기관인가.
특명에 따라 고위공직자 사정업무를 담당하는 의금부(義禁府)같은 조직이 아닌가. 만약 보증기관 일선지점장 비리조사가 정상적 업무라고 우긴다면 이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다.
청와대의 공직기강상태가 어땠길래 이 행정관은 상당기간 친형을 앞세운 회사의 임원으로 겸직할 수가 있었다.
만약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이 정부의 도덕성을 송두리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다. 도대체 공권력이 무엇이길래, 또 권부(權府)가 어떤 곳이길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도록, 한 시민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8순이 가까운 대통령은 IMF극복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이 미꾸라지같은 이 행정관은 권부를 팔아 은행돈을 마치 제 주머니돈 꺼내 쓰듯 했다니 열린 입이 잘 닫히지 않을 정도다.
뿐만 아니다. 여당의 사무부총장은 검찰과 선관위에 영향력을 행사, 여러 명의 소속의원 구제사실을 누설해 엄청난 파문에 휩싸이게 했다.
이쯤되면 집권세력의 관리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좀 가혹한 표현일진 모르나 ‘머리보다는 몸으로 하는 충성이 생존수단’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애초에 당을 맡긴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 아닐까.
정부가 마치 유토피아 사회가 올 것처럼 호들갑떨었던 의약분업은 또 어떤가. 한달이 넘게 환자를 인질로 한 유례없는 의사들 파업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의심받을 사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스스로도 아무런 준비없이 밀어부쳤다고 실토한 의약분업이야말로 정부로부터 민심이 떠나도록 한 중대한 실책이다.
무슨 생각으로, 또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밀어부쳤을까. 결과적으로 통치권자의 눈을 가린 이 엄청난 혼란상에 대해 어느 누구 한사람 ‘내탓이오’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은 아직 없다.
권력을 잡으면 세도를 부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 인간사다. 이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권력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와 국민앞에 더욱 겸허해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미봉하려다가는 오히려 사태를 덧나게 할 뿐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자세가 아니면 안된다. 아무리 누더기 헌정사지만 DJ마저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노진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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