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었다.'고무공' 이형택(24. 삼성증권)이 한국 테니스 사상 최초로 메이저대회에서 시드 배정자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형택은 1일 새벽(한국시간) 뉴욕 프러싱메도우의 국립테니스센터 10번코트에서 열린 2000 US오픈(총상금 1,500만달러) 남자단식 2라운드에서 세계랭킹 11위 프랑코 스퀼라리(24. 아르헨티나)를 3_0 (7_6
7_5 6_2)으로 완파하고 32강 고지를 밟았다.
올 프랑스오픈서 4강까지 올랐던 스퀼라리는 클레이코트 전문가이긴 하지만 13번 시드를 배정받았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선수다. 1981년 US오픈 여자단식에서 16강까지 올랐던 이덕희(46)도 당시 시드배정자에게는 무릎을 꿇었다. 이형택은 한국인으로는 역대 최상위 랭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형택은 1세트부터 베이스라인에서 날린 빠르고 깊숙한 포핸드스트로크를 앞세워 스퀼라리를 압박했다. 왼손잡이 스퀼라리가 백핸드공격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주원홍 감독의 전략이 들어맞았던 셈이다.
타이브레이크까지 간 첫 세트가 의외로 쉽게 이형택 쪽으로 기울자 스퀼라리는 라켓을 집어던지는 등 신경질을 부렸다. 결국 승리는 서브에이스 6개를 얻고 상대선수의 더블폴트 12개를 적절히 활용한 이형택에게 돌아갔다.
브롱크스챌린저 대회 이후 10연승 행진을 펼치고 있는 이형택은 32강전서 독일의 라이너 슈틀러(24. 세계랭킹67위)와 맞붙는다. 95년 프로에 입문한 슈틀러는 2라운드서 독일 테니스의 간판 토미 하스(22.세계랭킹38위)를 3_0(7_6 6_2 6_4)로 눌렀다.
메이저대회 최고성적은 올 윔블던 3회전진출로 이형택으로서는 충분히 해볼만한 상대다. 더구나 슈틀러는 서브가 시속 170KM 중반대로 패싱샷과 스트로크가 강점인 이형택이 상대하기엔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형택이 16강에 올라갈 경우 메이저대회 최다우승 보유자(13승) 피트 샘프러스(28.미국)와 맞선다.
■이형택 쾌거 "박세리 US오픈 우승과 맞먹어"
"아직도 이기고 있었어요.(Still win?)"
대회 장소인 국립테니스코트 선수 라운지 식당에서 안면이 있던 종업원들은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감독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전세계 2,000명의 프로 선수 가운데 US오픈 32강까지 오른 동양인은 이형택이 유일하다는 생각에 웃음으로 답했다고 한다. 종업원이 생각하기에도 이형택의 32강은 이변이었던 것이다.
이미 이형택은 상금 3만 5,000달러도 손에 넣었다. 1989년 호주오픈 1회전에 고배를 마셨던 김봉수는 "테니스인에게는 박세리가 2년전 US오픈에서 우승할 때와 맞먹는 의미다" 고 흥분했다. 포항공대 서의호 교수도 "이형택이 정글을 뚫었다"고 감격했다.
미 플로리다주에서 테니스 스쿨을 운영하며 앤드리 애거시, 모니카 셀레스 등 세계 톱랭커들을 길러낸 릭 볼리티에르가 남자 테니스계를 정글로 비유한 것을 빗댄 말이다.
여자단식에서는 박성희가 57위, 일본의 기미코 다테가 4위까지 올라간 적이 있지만 남자는 동양인 톱10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역대 한국 최상위 랭커였던 김봉수도 129위가 꼭지점이었다.
지난 52주 동안 프로테니스협회(ATP) 포인트를 합산해 결정하는 세계랭킹서 이형택은 지난주까지 181위. 8월말까지 205점을 얻었으나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32강까지 올라서 90점을 더 보탰다.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135위 수준.
랭킹 100위와는 아직 100점 가까이 떨어져 있다. 통상 5만달러 이상의 챌린저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50점이 주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브롱크스챌린저와 비슷한 규모의 대회를 2~3개 더 차지해야 한다. 24살의 젊은 나이에다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에 100위까지도 노려볼 만하다.
이형택의 쾌거는 스포츠 투자에 불도저식으로 밀어부치는 삼성의 후원이 컸다. 봉의고 2년때 42연승 행진을 보이며 가능성을 엿보이자 삼성은 이형택에게 관심을 표시했다. 건국대 2학년때부터 국제대회 참가를 돕는 후원을 도맡았고 97년 말부터는 주원홍 감독과 이상윤 코치가 2:1로 지도했다.
이미 박성희 신화를 만들어냈던 삼성은 선수연봉을 제외하고 투어경비에다 숙소제공 등 매년 1인당 1억 가까운 돈을 투자하고 있다. 공격적인 스타일의 이형택이 꽃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어머니를 위하여..눈물과 땀의 사모곡
홀로 식당일하며 뒷바라지 "국가대표 감독되야 칭찬"
1년에 20회 정도 외국 투어에 참가하는 이형택(24)은 이길 때마다 전화기를 찾아 헤맨다. 초등학교 3년 때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뒤 줄곧 서울에서 식당 일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온 어머니 최춘자(59)씨에게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최춘자씨는 1일 아침에도 막내 아들로부터 국제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할머니 생신에 못가게 생겼어." 사상 최초로 32강까지 올라간 이형택은 감격을 강원도 횡성서 처음 테니스를 시작했을 때 곁에 있었던 할머니 이옥숙(79)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신했다.
아버지가 없는데다 큰형 경택(32)씨가 소아마비를 앓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던 불우했던 가정형편. 그것이 이형택의 헝그리정신을 북돋웠는지도 모른다.
이형택은 테니스의 길이 지금은 꼭 불효 같은 생각에 더욱 열심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년이 지나 테니스부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물론 친척까지 나서서 말렸다. 학자 집안에 운동선수가 왠 말이냐고 반대한것.
하던 식당 일을 내팽개치고 급히 서울에서 횡성까지 달려간 어머니까지 나서 막내 아들은 설득했지만 "테니스를 할 수 없다면 학교를 가지않겠다" 고집을 피우는 통에 어머니는 할수 없이 테니스 라켓을 선물로 쥐어 주고 돌아왔다.
그 때 친척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을 버릇없이 키운다고 못마땅해 했지만 어엿하게 한국 남자 테니스의 간판으로 성장한 지금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팬이 됐다. 그 때문일까. 이형택은 코트에서 상대선수를 노려보는 눈매가 매섭고 경기를 끝나면 곧바로 주저앉을 정도로 온 힘을 코트에 쏟아 붓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만족할 때가 아니라며 아들을 한번 더 다그친다. 세계랭킹 100위 안에 들어간 뒤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되면 그때서야 제대로 된 칭찬을 하겠다는 것이 어머니 최씨의 생각이다.
/정원수기자nobl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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