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31일로 취임 2년을 맞았다. 야당 총재 이회창의 2년은 크게 시련의 전반기 1년과 착근의 후반기 1년으로 나눌 수 있다.97년 대선 패배 후 와신상담하던 이총재는 98년 8월31일 전당대회를 통해 한나라당 당수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 야당의 수장이 되던 당일부터 그는 세풍(稅風)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후에도 그는 여권의 야당의원 빼가기, 총풍(銃風) 등 엄혹한 정치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 영일(寧日)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총재가 작년 8월 취임 1주년에 즈음해 내놓은 슬로건은 제2 창당과 3김 청산이었다. ‘투사 이회창’을 ‘수권주자 이회창’으로 환골하기 위한 선택이자,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아 가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하지만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과의 애매한 관계설정, 중구난방의 언저리를 맴돌았던 제2 창당화 모색 등으로 그의 미래화 채색 작업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총재는 올 4월의 16대 총선과 5·31 전당대회를 통해 비로소 ‘창당(昌黨)화’에 성공한다. 공천 물갈이와 총선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대에서 66.3%의 지지율로 당을 평정, 차기 대선가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그럼에도 이총재는 여전히 대안 부재론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선 야권의 가장 확실한 차기주자이면서도 지역과 지지기반이 함께 취약하다는 근원적 결함을 벗지 못하고 있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제3의 영남후보론,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영남 고립론 등이 이회창 불가론과 간단없이 교직하며 그의 전도를 흔들고 있다.
그의 정치력에 대해선 당내에서조차 평가가 엇갈려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 JP와의 골프장 회동 및 그에 이은 국회법 날치기 밀약설 과정에서 드러난 원칙과 현실의 괴리는 정치 입문 시절부터 그를 따라 다닌 해묵은 난제다.
첫 단추를 잘못 꿴 남북문제, 국회 표대결에서 번번이 좌절을 안겨주고 있는 비(非) 한나라 연대, 포용과 척결의 양 극단을 어지럽게 넘나들고 있는 대(對) YS·JP 전략, 동지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든 정치적 포용력 빈곤 등은 이총재가 해결 해야할 무거운 숙제들이다.
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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