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과 함께 정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큰 돈보따리가 ‘기금(基金)’이다. 특수한 목적과 대상을 위해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자금이 필요할 때 예산과 별도로 조성해 운용하는 것이다. 현재 정부가 갖고 있는 각종 기금의 종류는 62개에 달하고 총액만도 196조원을 넘는다.기금은 국민 부담으로 조성되는데도 불구하고 예산과 달리 국회의 심의나 의결을 받지 않아 사실상 정부가 전권을 행사하는 돈이다. 때문에 기금은 국제사회에서 그 나라 정부재정의 이면(裏面)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잣대로 통한다. 정부의 총체적인 건전성을 나타내는 거울인 셈이다.
정부의 의뢰로 민간 평가단이 작성한 기금의 운용실태에 대한 종합평가 결과가 엊그제 발표됐다. 이런 평가작업 자체가 1961년 기금제도 도입이래 40년만에 처음이라는 사실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준조세 등 국민 부담으로 조성해 예산의 두배 규모에 이를 만큼 방대해질 때까지 단 한번도 공개적 검증작업이 없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지난 정부들이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막으려고 안간힘을 쓴 탓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번에 전모가 드러난 기금의 운용실상은 한마디로 방만의 극치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어림짐작했지만 막상 까놓고 보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운용주체들의 비전문성과 무사 안일주의가 빚은 주먹구구식 운영과 엄청난 낭비, 운용상의 위험성 등 한마디로 기금은 먼저 보고 쓰는 자가 임자인 ‘눈먼 돈’이었다. 기금을 ‘주머니돈이 쌈짓돈’식으로 여기는 주관부처들의 편법 전용행위도 예사로 이뤄졌다.
이러고도 기금의 관리 책임자들이 버젓이 행세하고 다니니 이만한 도덕적 해이를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관료주의의 온갖 악폐가 쌓일대로 쌓인 것이 바로 기금의 현주소인 것이다.
정부가 스스로 이같은 치부를 드러낸 것은 분명 전향적인 자세다. 한계수위를 벗어난 기금의 파행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재정개혁, 공공개혁도 구두선이 되리라는 자각의 발로일 것이다.
이번에 자복(自服)함으로써 국민에게 절반의 용서를 구한 만큼 조속히 대안과 대책, 그리고 강력한 집행력을 보여야 마땅하다.
유사 기금의 통폐합, 운용인력의 전문성 제고, 감시·감독의 제도적 강화 등 서둘러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투명성 제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당국자와 이해관계자들의 밀실담합으로 운용해온 결과 국민의 돈인 기금이 만신창이가 됐다. 의사결정과정과 운용체제를 개방하고, 공신력있는 내외 전문가들에 의한 정기적인 평가작업과 결과 공개가 무엇보다 긴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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