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저 옷 한번 입어보고 싶은 걸."백화점 쇼윈도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본 적이 있다면. 혹은 마네킹처럼 멋을 내고픈 욕망에 큰 맘먹고 카드를 긁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어느 노련한 디스플레이어가 쳐놓은 유혹의 그물에 걸려든 셈이다.
㈜유엘환경디자인 대표 서일윤(43)씨는 효과적인 상품의 배치와 진열을 통해 소비자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디스플레이' 전문가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기 위해 쇼윈도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일반 의류매장이나 화장품 가게부터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박물관 전시장, 국제 박람회까지…. 디스플레이 전문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공간은 너무도 많다.
선진국에선 요즘 '시각 경영'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비주얼 머천다이징 디렉터(Visual Merchandising Director? 약어 VMD)'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각광받는 직업이다. 변변한 백화점 하나 없던 1980년대 초부터 이 일을 시작했으니 서씨는 국내 VMD 분야를 개척해온 '1세대'나 다름없다.
대학(한양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그는 '평범한 오케스트라 연주가로 안주하기 싫어' 졸업 후 과감히 진로를 바꿨다. 평소 미술 분야에도 소질이 많았는데 이탈리아의 예술직업학교 벨라아르띠(Belle Arti)에서 인테리어와 장식미술을 공부하고 온 뒤부터 아예 프리랜서 디스플레이어로 전업을 했다.
8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선 디스플레이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때라 프로필과 기획서를 들고 일일이 명동의 매장들을 휘젓고 다니며 하루종일 일감을 찾아 나서야 했다. 운 좋게 일감을 얻었다 해도 '무형의 작업'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 한번은 비타민C를 함유한 신제품 화장품의 디스플레이를 맡았을 때다.
며칠밤을 숙고한 끝에 아크릴로 만든 바스켓에 싱싱한 오렌지를 듬뿍 담아 진열장 곳곳에 설치했다. 제품의 이미지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는 평가를 들었고, 덕분에 신제품 출시 이벤트는 성황리에 끝났다. 하지만 업체측으로부터 디스플레이의 대가로 받은 돈은 아크릴과 오렌지 값 몇 만원이 전부였다.
85년 디스플레이 전문대행사 유엘환경디자인을 창업하던 무렵에야 비로소 디스플레이는 컨설팅의 한 분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0대 여성을 주 타깃으로 한 의류 브랜드의 매장 전체를 아예 '디스코텍'처럼 꾸민다든가 하는 기발한 디스플레이로 이름을 날리면서 굵직한 클라이언트들을 잇따라 확보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점과 롯데백화점 잠실점, 분당 삼성프라자, 청구 블루힐백화점 등은 하나같이 서씨의 디스플레이 작업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백화점들. '시각 마케팅'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요즘엔 일반 고객의 출입이 잦은 증권회사나 자동차회사, 건설업체 등으로 업무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대학이나 기업체의 디스플레이 강사로도 바삐 뛰고 있는 서씨는 "디스플레이는 철저히 상업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품에 고객들의 시선과 마음을 끌어당겨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야말로 디스플레이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만의 개성이나 예술가적 상상력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철저히 상품의 속성에 어울리는 실용적인 디스플레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업무의 특성상 고객이 없는 심야에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서씨는 "VMD로 성공하려면 1년에 최소한 200일이 넘는 밤샘작업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체력과 일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다"며 "고객의 변화무쌍한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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