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 않는다. 책 읽는 속도가 유난히 느리고 한 번 읽을 때 매우 꼼꼼히 읽는 편이라 같은 책을 두 번 세 번 읽을 만큼 숨이 길지 못하다.그런 내가 유일하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책이 있다. 바로 ‘삼국지’다. 중학교 1학년때 처음 읽기 시작해 대학 졸업때까지 족히 열 번은 읽었으리라.
그런데 ‘삼국지’를 과연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냐를 놓고 종종 논란이 인다.
신의와 명분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야심가들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상대를 속여 궁지에 몰아넣는 용병술을 가르치는 책을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권해서는 안된다는 우려와 ‘삼국지’의 진짜 교훈은 정의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진 충신절사들의 무용담 속에 숨어 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삼국지’에 그려진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먹듯 하며 주변의 가까운 한두 사람에게 그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약속도 아니고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 없이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연인이나 친구에게는 불륜과 배반의 흔적만 보여도 가차없이 절교를 선언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져야 할 정치지도자들의 부도덕에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깨끗한’ 한 표를 건네는 우리 유권자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동물행동학자인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중미의 열대림에는 대나무처럼 속이 텅 빈 트럼펫나무 속에 아즈텍이라는 개미들이 산다. 다 자란 나무 속에는 어김없이 한 여왕이 통치하는 하나의 개미왕국이 자리잡고 있지만 어린 나무 속에는 장차 그 나무를 차지하려는 여러 여왕개미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이같은 개미 춘추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먼저 강력한 군대를 길러내야 한다. 개미왕국의 군사력이란 한 마디로 일개미의 수를 의미하는데 여왕개미 혼자서 키워낼 수 있는 일개미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즈텍 여왕개미들은 다른 여왕들과 한 살림을 차려 같은 시간 내에 몇 배의 일개미들을 길러낸 후 천하를 평정하는 전략을 꾀한다.
재미있는 일은 아즈텍 여왕개미들이 같은 종의 여왕들은 물론 다른 종의 여왕개미들과도 서슴없이 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념이 다른 정치인들이 오로지 정권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합종연횡하는 모습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하신 공자님 말씀은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돼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칭송 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과연 악에서 선을 끌어내라는 가르침이 효과가 있을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삼국지’를 권한다. 다른 많은 동물들과는 달리 도덕적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묘한 동물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것이다.
/최재천 서울대교수 생명과학부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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