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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진정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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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진정한 용기

입력
2000.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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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동방정책’이라 불리는 대(對) 사회주의권 화해정책으로 동서독 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수상이 1970년 바르샤바를 방문하였을 때 찍은 사진이다.2차 대전중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 점령군에 항거하여 봉기한 일을 기념하는 탑에 헌화하러왔던 그는 돌연 그 앞에 무릎꿇고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머리숙여 사죄한 것이다.

브란트는 나치 독일이 전쟁 정책에 광분하자 이에 항의하여 국적을 노르웨이로 바꾸고 노르웨이 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나치군에 맞서 싸웠을 정도로 유대인 학살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후 서독 정권의 수반이 되었고 나치 만행의 속죄라는 과제 앞에 자신의 개인사와는 무관하게 독일 국민의 대표자로서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 학살 기념탑 앞에 무릎꿇은 브란트의 사진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갔고 세계인들은 독일인의 역사청산 노력이 진실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파시스트’라는 말을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욕설로 여길 정도였던 소련인들이나 폴란드인들도 서독 정부의 화해정책을 신뢰로써 대하게 되었다. 브란트는 진정으로 용기있는 그의 사죄행위를 통해 자신이 추진하던 동방정책의 실현에도 큰 도움을 얻게 된 것이다.

8월은 역사의 화해와 용서에 대해 유난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달이다.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변함없이 졸렬하게 구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저지른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충분치 못한 경우 그 후손들 사이에서도 진정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당한 피해를 잊지 않고 이에 대한 정당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자존심있는 사회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발을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줄곧 남으로부터 당한 피해만을 강조하고, 스스로는 다른 국민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는 평화 애호 민족이라는 점만을 역설하여왔다.

얼마 전부터 제기되고있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거론조차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나치나 일본군국주의에 비교할만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적은 결코 없다. 극한적인 전쟁 상황 속에서 산발적으로 저질러진 행위들이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25년도 더 지난 지금, 어쨌건 그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은 당연한 요구이다.

그것은 죽고 사는 것이 한 순간에 결정되는 극한상황에서 집단 논리에 따라 행동했던 참전군인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일은 결코 아니다. 또한 군부에 책임을 돌리고 그 사기를 떨어뜨리자는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미국의 패권전략에 따라 남의 나라 민족독립노력을 분쇄하는 데 군대를 파견했던 한국의 독재정권의 결정과 이로 인해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게 가했던 아픔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자는 취지일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 문제를 제기하고 다룰 만큼 민주적이고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기쁜 일이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고조되면서 이것이 자칫하면 다른 모든 대내외적 문제들을 뒤덮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진정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일 가운데 하나는 다른 국민과의 관계에서 스스로가 저지른 과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수용하여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과오가 분명한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일이다.

브란트의 사과가 서독의 정치적 성숙도에 대한 신뢰감을 강화시키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독일 통일의 미래를 밝게 해 주었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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