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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일] 생존본능 키워 자립심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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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일] 생존본능 키워 자립심 커져

입력
2000.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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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에 엄청난 약골이었다. 잔병치레가 떠나지 않았다. 유행병은 먼저 내게 인사하러 오는 것같았다. 걸핏하면 감기에, 고열에 늘 배가 아팠다.학교를 쉬고 자리에 누운 적도 많았다. 형은 아주 건강하고 장난꾸러기였는데 “야, 나도 너처럼 좀 아파 봤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야, 나도 형처럼 뛰어놀았으면 좋겠다”라고 서로를 부러워했다. 그러다 나아서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반가워하면서 열이 있나 없나 내 이마를 짚어 보기도 했다.

1955년 6학년을 끝낸 나는 어린시절중 가장 큰 시련을 맞았다. 어머니가 서울의 중학교에 혼자 올라가기를 강권한 것이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부산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 하나만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한다고 주장하셨다. 선생님들도 같은 권유를 했는지, 어머니는 둘째의 재능이 부산서 썩히기는 아깝다면서 아픈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나는 두렵고 싫어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겨울방학에 서울로 끌려갔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연기와 석탄가루 때문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야하는 열세시간의 긴 기차여행이었다. 서울은 지긋지긋하게 추웠다.

새문안 친척집에는 동갑내기가 있었고 그 아이와 시험준비를 같이하라는 깊은 배려였다. 어렵지 않게 합격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별의 전주곡이었다. 나는 집안이 되는 내수동 할아버지댁으로 옮겨져 하숙을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학교 생활은 외톨이였고 하숙집의 밥과 반찬은 질에도, 양에도 차질 않았다. 참으로 암담했다.

서울엔 아는 집이 없었다. 드물게 학교 친구의 집에 놀러가면 가슴이 저렸다. 화목한 가족생활이 부러워서였다. 나는 과묵한 소년으로 변했다.

침묵은 항변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말로 나를 위해 이런다는 걸 확신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혼자 돌아가는 기차에서 울면서 아픈 마음을 달랬을 지 모르되 어느 면에서도 마음 아파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고 내게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 아픈 배신감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뜻밖의 경험이었다. 내게는 자연스럽게 동물적 생존본능같은 것이 축적됐다.

하숙생활은 나의 신체에서부터 마음가짐에까지 그전에는 생각못했던 놀라운 현상을 일으켰다. 편식하던 습관이 고쳐졌고 잔병치레가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튼튼하고 자립심 강한 소년이 되어갔다. 그러나 내게는 평생 잊지못할 힘든 시절이었다.

/김 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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