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자신의 것을 빼앗겼을 때 좌절한다. 국민은 자신의 기회를 빼앗겼을 때 억울해 한다.특히 그 빼앗김이 잘못된 제도, 고칠 수 있었지만 고쳐지지 않은 제도와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을 때 국민은 더 깊은 좌절과 더 큰 억울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이가 정치현실과 경제상황에 답답해 하고 억울해 하는 건 그런 정치와 경제가 결국에는 자신의 것을 앗아가리라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따른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신영식(申榮植·50·인테리어업·서울 중구 신당동)씨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는 빼앗긴 것을 다시 찾겠다고 시간과 돈을 들였지만 그것도 벽에 부딪혀 이제는 포기할까 생각하다 마지막 하소연을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재개발지구 원주민이다. 지난 6월초 완공, 입주가 시작된 서울 신당3구역 재개발지구(남산타운) 42평짜리 아파트 입주자격이 있지만 아직 입주를 못하고 있다.
입주하려면 1억원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게 없으니 빚을 내야 한다. 담보가 없으니 일부는 신용대출을 받고 일부는 친지들한테서 빌려야겠지만 월 평균 300만원이 채 안되는 수입으로는 아마 신용대출도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출을 받는다 해도 한달 평균 120만원은 족히 될 이자를 내면 노모와 아내, 아들 셋 생활이 어렵게 된다.
2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은 땅값을 내기위해서도 매월 그만큼 적립해야 한다. 10월에는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을 내주어야 한다.
스스로 “옴치고 뛸 수도 없다”며 신세를 한탄하던 그는 “저 아파트만 보면 화가 난다. 이렇게 억울할 수 있는지”라고 말했다.
-무엇이 억울한가.
“몇 년을 이 지역에 내 집이 들어서길 기다려왔다.
그런데 막상 완공됐는데도 들어가 살 수 없으니 억울하지 않은가.” 1973년 신당3동 달동네로 이사온 그는 재개발이 빨리 추진되려면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생각에 남보다 앞서 1996년 이웃 신당2동의 한 연립주택으로 옮겨갔다.
재개발이 본격 추진된 때부터 따지면 15년을 기다려 왔지만 남은 건 분노뿐이라는 것이다.
-이사를 못 가는 건 본인 탓 아닌가. 다른 무엇을 탓할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내 집에 못 들어가는 건 내 문제가 맞다. 그러나 2,000명 가까운 이 지역 재개발조합원 대다수가 나와 같은 처지라면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에 문제가 있거나 관행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분양받은 아파트를 내놓으면 3억8,000만원에서 4억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팔기 전에 서울시에 땅(시유지)값과 이자, 아파트 건축비, 시유지 사용료 격인 변상금, 건축업자들로부터 받은 이주비와 이자를 내야 한다.
약 3억8,000만원이다. 비록 시유지이지만 살던 집과 땅을 내놓고 그렇게 오래 기다려왔는데 남는 것이라곤 잘 해야 2,000만원이다.
“저 집에 못 들어가면 2,000만원을 가지고 살 집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나만이 아니다. 원래 이 곳에 살았던 내가 이런 형편이니 프리미엄을 주고 조합원 지분을 산 사람들은 완전히 망했다.
42평형 프리미엄이 1억원에서 1억5,000만원은 됐으니 그 사람들은 아파트를 파는 순간 최소한 그만큼 손해를 볼 것이고 들어가 살려 해도 4억원 짜리 아파트를 5억원이나 5억5,000만원을 주고 입주하는 셈이니 나보다 더 억울할 것이다.
투기목적으로 조합원 지분을 산 사람도 있겠지만 재개발을 통해 집이나 키우자고 투자한 사람들은 집을 키우기는커녕 빚만 지게 된 것이다. 32평짜리 조합원도 거의 비슷한 형편이다.”
-지금 부동산경기가 나빠서 그런 것이지, 집값이 오르면 오히려 투자를 잘 했다고 좋아했을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지금 실정에서 집값이 오르면 얼마나 오르겠는가. 서울에서 강남 일부지역만 빼고 42평 아파트가 평균 5억원이 넘는 단지는 없다.
그렇게 오를 리도 없거니와 올라서 돈이 남았다고 해도 제도와 관행이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다는 건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잘 뜯어보면 재개발정책은 전부가 모순덩어리다. 우선 시유지 불하대금이다. 이 곳의 불하대금은 평균 평당 420만원이다.
원래 이 곳은 임야였다. 그런데도 불하대금은 대지로 평가해 책정됐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은 대지가 됐다.
그렇지만 이 곳을 대지로 만드는 데 시가 돈을 댔나. 아니다. 조합원이 낸 돈으로 대지조성공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비용까지 불하대금에 포함시켜 부과하나. 대지조성공사비(개량비)는 불하대금의 70%나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행정당국이 주거환경 개선, 서민의 내집마련 기회 확대 등 재개발사업의 기본목적은 도외시하고 땅장사를 한 것 아닌가.”
그는 당국의 땅장사로 아파트분양가가 오르게 됐으며 이는 주택가격 안정이라는 책무와도 배치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는 비점유 토지 가격이다. 비점유 토지는 재개발지구 안의 하천이나 도로 등이 대부분으로 조합이 재개발사업상 필요해서 일괄로 사들이는 게 보통인데 이런 토지도 일반 시유지 불하대금에 준해서 가격을 매겼다.
안 사들이면 사업이 안되니 울며 겨자먹기로 1만3,000평을 160억원에 사들였는데 이자를 포함하면 200억원이 된다.
감정평가사들도 100억원이면 된다고 평가했고 우리가 제기한 민원을 검토한 서울시 고문변호사들도 160억원이라는 평가가 잘못됐다, 낮춰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실무자들은 요지부동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임대주택 문제다. 법규상 재개발조합은 지구 내 땅을 일정 부분 떼어내 영세민용 임대아파트를 지어서 지방자치단체에 넘기도록 되어있다.
이 곳의 임대아파트 건설에는 평당 건축비와 간접비를 포함해 평당 260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서울시는 우리한테서 평당 200만원에 매입해 영세민들에게 임대하고 있다.
임대아파트 총건평이 3만평이니 180억원을 빼앗긴 것이다. 영세민들을 위해 땅을 내놓는 건 이해한다 치자, 건축비는 제대로 계산해줘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서민 아닌가. 변상금 문제도 그렇다.
시당국이 직접 재개발사업(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할 때는 변상금을 물리지 않으면서 왜 우리처럼 민간이 하는 곳에는 물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가 부담하지 않아도 될 것을 부담한 액수를 모두 더 하면 300억~400억원이이다.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곳에 투자해서 돈을 남긴 사람은 전혀 없나.
남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은 지금 팔면 현금으로는 약간 남을 것이다. 그동안의 투자비 이자를 따지면 글쎄 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백 여가구 정도일 것이다. 이 곳에서 돈을 번 사람은 초기에 딱지거래를 중개했던 부동산업소와 서울시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억울하다면 왜 시정을 요구하지 않는가.
"왜 안 했겠는가. 시청과 구청을 수 십 번 찾아다녔다. 시민감사청구제도라는 게 있어 조합원 600명의 서명을 일일이 받아 청원도 해보고 그것도 안 받아들여져 조합원들을 모아 시위도 해보았다.
제도를 바꾸자고 공청회도 주관했다. 거기 쓴 돈도 몇 천 만원이 넘는다. 시간은 얼마나 빼앗겼나. 그런데도 마이동풍이고 오불관언이며 무사안일 복지부동이었다.”
-시로부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불하대금이 비싸다고 줄기차게 항의한 결과 연리 5%로 20년 분할상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나마 해준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얻은 것이 없다.
임대아파트 매각대금처럼 명확히 잘못된 데 대해서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더라. 새로 재개발하는 지역은 좋겠지만 우리는 그냥 손해를 덮어쓰라는 거다.
비점유토지 문제나 시유지 불하대금 문제에 대해서는 ‘시재정이 어려워서 그렇게 됐다’거나 ‘당신네만 봐주면 다른 조합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못 해준다’ ‘우리는 해주고 싶은데 재경부와 건교부 규정이 그렇게 안 돼있어 할 수 없다’는 게 전부다. 이게 행정인가. 국민은 사소한 것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재개발 이대로 가면 10만명이 울게 된다
“이 양반 말이 다 맞아요. 여기 투자했다가 망해가지고 가정파탄 난 집이 한 둘이 아니에요. 못들어 온 사람도 많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입주한 사람도 저녁에 새 집에 누우면 화 밖에 안 난다고 그럽니다.”
1억원이 있어야만 우선은 들어갈 수 있다는 신씨의 아파트 앞 어린이놀이터에서 그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1995년에 1억원 정도 프리미엄을 주고 42평형 조합원 지분을 샀는데 입주금이 없어 못들어 간다고 털어놓았다. “팔아도 손해, 들어가 살아도 손해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답해서 부동산업소를 찾아왔다가 대책없이 그냥 돌아가는 길입니다.”“어떤 분은 2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했다가 7,000만원만 남기고 팔아 원당에서 전세를 살고 있답니다.”
신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고 다니다가 재개발정책에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자를 만날 때도 ‘변상금문제’ ‘비점유토지에 대한 시민감사권’‘재개발지구의 과밀부담금’ ‘국회청원’ ‘도시개발법’ ‘수도권정비법’ 등의 서류철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이거 전부 설명하면 기막힐 거다.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는 서울 등 전국에 80여개 10만가구로 추정되는 재개발지구 주민과 조합원들은 자신보다 더한 눈물과 고통을 쏟아내야 할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조건이 우리보다 더 나쁘다. 이 곳은 비례율이 86%였지만 재개발 사업추진중인 서울시내 조합중 비례율이 80%가 안 되는 곳이 많고 어떤 지역은 75%정도 밖에 안된다. 비례율이 75%라는 건 100평을 사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건 75평이라는 말이다.”
(비례율이란 재개발지구 전체 부지에서 임대아파트 부지, 도로용지, 공원 등 기타 공용부지를 제외한 부분을 전체부지로 나눈 비율. 비례율이 낮을 수록 조합원 부담은 늘어난다.)
“비례율이 86%인 우리도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75%인 지역 조합원들이 어떤 심정인지는 안 봐도 훤하다.
10만명의 세대주가 제대로 잠도 못자고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판이면 재개발정책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못 바꾸면 재개발을 하지를 말든지.”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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