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이래 철학의 주류는 형이상학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렀을 때, 그 지혜는 사물의 본성, 진리, 본질, 실재, 이성, 존재 따위의 형이상에 대한 앎이었다.말하자면 철학적 탐구의 대상은 형체라는 거죽 너머에 있는 세계의 ‘진짜 모습’ 이었다. 그 형이상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 유럽의 지성사에 솟아오른 것이 실증주의다.
오귀스트 콩트의 프랑스 실증철학이나 제레미 벤덤, 존 스튜어트 밀의 영국 공리주의는 그 시기의 실증주의를 대표한다.
19세기말부터 미국에서 개화한 프래그머티즘은, 오스트리아의 빈과 영어권을 중심으로 개화한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함께, 20세기 실증주의의 화려한 꽃봉오리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프래그머티즘은, 그것의 유력한 전파자 가운데 한 사람인 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다윈의 진화론이 사상의 모든 영역에서 불지핀 혁명에 유일하게 부합하는 철학이고, 그래서 21세기를 감당할 유력한 철학 가운데 하나다.
프래그머티즘의 역사는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라는 세 이름을 굵은 활자로 기록하고 있다.
퍼스에 따르면 개념이란 그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제임스에 따르면 한 관념이 참이 되는 것은 그 관념에 우리 행동이 이끌릴 때, 즉 그 관념이 유용하게 될 때다.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을 도구주의라고 부른 바 있는 듀이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도구이고, 도구라는 것이 죄다 그렇듯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용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서 나타나는 유효성에 있다. 얼추 서로 비슷한 생각들이다.
프래그머티즘을 대륙 철학과의 관련 속에 성찰해온 로티의 ‘앎 대신의 희망’ (1994)은 프래그머티즘을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의 철학으로서, 앎의 원리만이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원리로서 내세운다.
다른 실증주의 철학들이 그렇듯, 프래그머티즘도 형이상학에 대한 불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절대에 대한 탐색, 보편적이고 영원한 원리들에 대한 갈구를 앎에서나 실천에서나 포기하라고 권고한다.
철학의 목적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에 대한 우리들의 희망이 실현될 미래를 향해 인간의 행동을 더 효율적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형이상학의 창시자들은 ‘사물의 본성’ 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에서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를 찾았다.
감각의 테두리 안에 있는 외양 너머의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사물의 본성’ 은 플라톤에 의해서 ‘이데아’ 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형이상학은 진리를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와 생각의 합치’ 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프래그머티스트에게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실재’ 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티는 다윈의 진화론이 모든 본질주의적 담론들의 부질없음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동물의 능력과 인간의 정신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우리들이 파충류보다 ‘실재’ 를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능력이 동물들의 그것보다 단지 더 진화했고, 그래서 더 효율적일 뿐이다.
프래그머티즘은 그러므로 가치와 앎에 대한 진화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스트가 보기에 인간의 사상의 역사는 절대적 앎을 향한 정신의 필연적 진행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안에서 적응하는 과정일 뿐이다.
‘진정하고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고전적 정의에 맞서 프래그머티즘은 ‘정당화된 믿음’ 의 개념을 내세운다.
정당화된 믿음이란 사람들 사이의 동의에 기초한, 사회적·생물학적으로 유용한 의견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적 기술(記述)이 지니고 있는 효용이다. 사람들이 지식의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해결책을 향한 여정이라기보다는 일련의 문제틀이나 관점의 변화들이다.
모든 믿음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리’ 라고 부르는 ‘정당화한’ 믿음들까지를 포함하여, 실재를 재현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행동의 규칙들’ 일 뿐이다.
다윈은 진보가 목적론적 종말 즉 이상적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티가 보기에는, 실질도 본질도 없는 세계, 곧 절대적 참조틀이 없는 세계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문화적 진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프래그머티즘은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거부한다. 즉 인간에게는 어떤 본질이 있다는 생각, 영속적으로 결정돼 있거나 역사 속에서 실현해야 할 본성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새롭게 정의될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도덕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효율적인 도덕은 ‘보편적 의무가 없는 윤리’ 다. 로티에 따르면 도덕은 순수이성의 정언적·절대적·무조건적 명령에 대한 추상적 복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 속한다.
칸트의 ‘순수이성’ 같은 것은 프래그머티스트가 보기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처럼, 미국의 프래그머티스트들도 선과 효율을 구별하지 않는다.
즉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선이다. 다만, 프래그머티스트에게는, 그 행복이 순수한 물질적 쾌락들의 총합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프래그머티즘의 도덕은 민주주의나 인권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로티에게, 민주주의는 집단적 삶의 양식으로 세워진 ‘일반화된 다위니즘’ 이다.
그는 민주주의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적인 것의 영원한 재발명의 과정이고, 우리 종의 미래의 영원한 재발명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변형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들에게 더 낫게 보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스트로서의 로티가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계몽의 희망과 다윈의 생물학을 화해시킨 최선의 예다.
미국 사회가 늘 모호함과 생성의 비결정성을 간직하면서도 미래를 신뢰하고 미래에 대해 열려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로티에 따르면 미국 사회는 프래그머티즘의 ‘실험적이고 희망에 찬 심성’ 을 정치로 만들었다. 프래그머티즘은 그래서 미국 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프래그머티즘의 미래는 미국의 미래와 붙어 있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리처드 로티(69)는 뉴욕 태생이다.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2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지금은 샬러트빌의 버지니아대학 인문학과 교수로 있다.
로티의 이름이 철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67년에 ‘언어적 전회’ 를 펴내면서다.
그는 이 책에서 분석철학의 중요한 문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언어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분석철학자로 출발해 뒷날 해체론에까지 관심을 보인 로티에 따르면, 우리는 피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언어의 바깥으로도 나갈 수 없다.
출세작은 79년에 출간한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이 ‘실재’ 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즉 ‘진리’ 를 찾아내는 학문이라는 전통적 철학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면서 반_기반주의(anti-foundationalism)를 내세웠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 기반주의란, 인식 가운데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다른 지식들이 수립된다는 입장을 말한다.
예컨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데카르트 철학의 방법적 회의, 후설 현상학의 본질 직관 같은 것이 그런 기초적 인식에 속한다.
그런데 로티에 따르면,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그런 특권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재’ 를 비춤으로써 그런 기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 이란 것도 근대 철학이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심리철학의 중요한 쟁점인 ‘마음과 몸의 문제’(the mind-body problem)에서 흔히 ‘제거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정신 현상을 과학의 영역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과격한 유물론의 입장을 취한 바 있다. 로티는 지난 96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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