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가을, 60년대 후반의 마르가 할머니는 서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아주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2차대전 당시의 총탄자국들이 아직도 벽면 곳곳에 남아 있는 낡고 작은 집의 안팎을 할머니는 온통 형형색색의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해 놓고 있었다.
지난번 부활절에 이어 크리스마스때 또다시 동독 북부의 고향 메클렌부르크를 방문할 준비를 하면서 할머니는 그곳에 사는 외아들부부와 손자들을 만날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할머니의 얼굴 어느 구석에서도 이산가족의 슬픔이나 아픔 따위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1999년 여름, 미국의 몬태나대학에서 전쟁 당사국 중 북한이 불참한 가운데 한국과 미국, 중국의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 ‘한국전쟁에 관한 대화’를 며칠째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쓴 분단소설들을 예로 들어 분단과 이산에 따른 한민족의 고통을 누누이 설명했다. 발표가 끝나자 나이 지긋한 중국인 학자가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헤어진 가족들끼리 아직도 왜 만나지 못하는 거냐고. 순간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결코 한국인들을 조롱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지구상에 둘도 없는 그 지독한 분단 현상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분단국이면서도 중국인들은 이미 1980년대부터 대만쪽과 교류를 터 탐친(探親)행사로 고향을 방문해서 가족을 만나고 송금을 하고 서신을 교환해오지 않았던가.
8·15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화면으로 지켜보는 동안 나는 한편으로 남의 일이 아닌 듯, 다름아닌 나 자신의 일인 양 줄곧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속에서 불쑥 끄집어낸 두 개의 삽화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독일과 중국의 것들이 인간세상에서 간혹 있을 수 있는, 그래서 제법 견딜 만한 분단이라면 우리의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그래서 인간으로서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분단인 셈이다.
저들의 분단이 대국의 것이라면 우리의 분단은 소국의 것이다. 국토의 면적 얘기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의 면적 얘기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서울과 평양에서 벌어진 이산가족 상봉은 일차적 의미로 기쁨이고 다행이지만 이차적 의미로는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기도 하다.
일차적으로 감격과 감동의 물결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민족적 약점의 노출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해도 아무 할말이 없을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전세계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잔인성과 협량함을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들 보았을 것이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남북이 각각 자기네 체제의 우위와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에 아까운 국력과 세월을 허비하다가 반세기가 지난 이제야,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만날 수 있는 알량한 상봉의 자리를 마련했을까.
오죽이나 모질게 타고났으면 헤어진 혈육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몇 자 안부를 전하려는 이산가족들의 비원조차 외면한 채 55년을 내내 대치상태로만 일관해 나왔겠는가.
도대체 요즘 이념의 값이 한 근에 얼마나 하는지 묻고 싶다. 정치의 시가는 또 킬로그램당 얼마나 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인간답게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이념이나 정치의 할일이다. 힘없는 백성의 눈에서 피눈물을 찍어내는 이념이나 정치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모처럼 55년 만의 이 귀한 시작이 또다시 물거품이 되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국제적으로 망신살을 뻗쳐 세계인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게끔 남과 북의 위정자 뿐만 아니라 민족 구성원 전체가 하나로 똘똘 뭉쳐 분단상황의 해소는 물론 더 나아가 통일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신명을 바쳐야 할 때다.
/윤흥길·소설가·한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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