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고려대학교에 50억원의 발전기금을 희사한 한 기업인이 있다. “좋은 언론인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기탁목적을 밝혔다고 한다.그는 4년 전에는 서울대학교에 40억원을 내놨었다. 젊어서 원양어선의 항해사로, 선장으로 참치잡이에 종사하다가 직접 기업을 일구고 키워온, 잘 알려진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지금 2년째 무역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바닷고기 잡던 사람이 무역협회장인 것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그쪽 관계자들은 꼭 그렇게 보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서의 인품과 능력을 알기 때문인지 모른다.
곧이곧대로 내는 사람은 바보라고 해서 ‘바보세’로 불리는 상속·증여세를 자진해서 62억여원이나 물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던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자진 납세가 수상했던 세무당국자가 세무조사를 벌인 후 “의심을 품었던 사실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던가.
아무튼, 그런 그에게 무역협회장답다고 할 만한 ‘무역철학’이 없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국토_해양의 우위를 살리는 21세기 신 무역전략’이라고 제목 붙여 발표한 일이 있다.
한 마디로 하면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 이점을 살리는 진취적 국가발전전략으로 세계 중심국가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해상→대륙, 대륙→해상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물류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무역은 상품만을 교역하는 것이 아니라 물류서비스, 관광, 자본이동을 포함하는 ‘복합무역’의 새로운 개념이다.
문제는 ‘지정학’이다. 어찌 보면 꽤는 낡은 듯한 이 말이 올 여름 갑자기 자주 눈에 띈다. 남북정상회담이 가져온 변화 탓이다.
일찍이 ‘지정학적 숙명론’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극동의 변방, 강대국 사이에 놓인 반도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세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나라를 빼앗기는데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생각이다.
강자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의 일종인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김교신(金敎臣·1901-1945)이 격렬한 반론을 남긴 것이 있다. 그에 의하면 한반도는 극동의 심장이며, 우리 민족이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의 유일한 근거다.
이만한 국토는 오히려 우리 민족이 웅비할 터전이고 기회일 뿐이지,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숙명론의 근거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정학(地政學·Geopolitics)은 본래 1, 2차대전 무렵 널리 쓰인 국가과학용어라고 한다. 도중에 독일에서 ‘생활권’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가 나치의 ‘세계지배’ 이론으로 각색돼 침략정책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된 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전풀이다.
어쨌거나 ‘국가 존립 또는 정책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자연적 조건’의 뜻이라면 지금 이 나라를 둘러싼 지정학은 여러 모로 각광받는 것이 당연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2일 청와대회의에서 웃옷을 벗어던지고 “동북아 주변국에서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세계 중심국가로” 나아가는 ‘한반도 지정학’을 다시 역설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강조했던 “바야흐로 한반도 시대”의 논리다. ‘해양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는 거점,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아가는 전진기지’로서의 ‘관문’론은 무역협회장의 것과 뜻이 같다.
그 ‘관문’을 구체화하는 첫 발걸음이 9월 중순으로 예정된 경의선복원 착공이다. 다음 주 평양에서 열릴 남북장관급 2차회담의 우선적인 의제도 ‘철의 실크로드’ 복원공사 관련일 것이다. 남북 철도 연결은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 변동의 결정판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꾸어볼 만한 꿈’의 실현이다.
김대통령은 집권 5년의 반환점을 돌았다. 지나간 절반에 대한 여러 평가와 관계없이, 눈 앞에 닥친 현실은 장면 하나하나가 엄혹하다.
그는 민족사에 큰 꿈을 실현하는 첫 발을 내디디고 있으나, 현실에서는 함께 꿈꾸려 들지 않는 국민이 적지 않다. 급격하고 엄청난 변화가 실감되지 않는 탓이라고 미뤄짐작해서는 안된다.
다만 잠시 어지러울 뿐일 것이라고 믿을 일도 아니다. 등돌리고 돌아서 가는 민심을 쓰다듬고 돌려 세우는 보다 더 세심한 노력이 앞으로 남은 후반의 핵심 과제일 것이다.
북을 돌려 세우고, 한반도 지정학의 새로운 꿈을 펼치고, 평화정착의 위대한 업적들을 세운다 하더라도 ‘국민이 다함께 어깨를 겯고 가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정달영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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