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회에 사형폐지법안이 의원입법으로 제출되었다는 소식에 길로틴이 떠올랐다. 날카로우며 육중한 무게의 칼날로 목을 단숨에 댕강 자르는 단두대 말이다.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길로틴이 연상시키는 풍경은 상상 만해도 끔직하고 야만적이다.
길로틴은 프랑스 혁명 중이던 1792년 의사이자 국민의회의 일원이었던 길로땡(Joseph-Ignace Guillotin)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혁명정부가 모든 사형집행을 이 기계에 의하여야 한다는 법을 제정한 후, 이 기계는 프랑스 혁명 전과정에서 수많은 왕당파, 혁명가 그리고 시민의 목을 단숨에 동체와 분리시켜 주었다.
그런데 길로틴에 의한 사형집행은 당시의 시각으로는 ‘인도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사형집행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하면 많은 고통을 사형수에게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절두형(切頭刑)은 시행되었으나 이는 귀족층에 한하여 사용되었다. 길로틴은 바로 고통의 최소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인도주의’적이었다.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두형을 사형집행방법으로 취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원래 출발은 ‘인도주의’적이었을는지 모르나 현재의 문명수준에서 절두형을 ‘인도주의’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형사사법이 취하고 있는 교수형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혹시 교수형이 길로틴에 의한 절두형 보다 고통을 더욱 많이 오랫동안 주고 있지는 않을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제 우리 사회도 사형집행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형제도 자체가 반(反)인도주의성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공분(公憤)이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본능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로서의 사형은 오판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만든다는 점, 사형에 의한 범죄억지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 우리 현대사에서 경험하였듯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복수로 사용되기 십상이라는 점등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본능’의 직접적 표출은 순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사형제도를 당연시하는 관념에서 벗어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내외 인권단체의 사형폐지 요청에 진지하게 귀기울일 때이다.
/조국 동국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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