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은 지난 12일 남한의 신문ㆍ방송 사장단을 만나, 꽤 많은 말을 했다. 느닷 없는 듯한 대목이 많았지만, 대화록을 뜯어보면 그 말들이 면밀한 검토 끝에 나온 말이란 느낌이든다. 남ㆍ북 여러 현안에 대한 사전의 내부 논의의 결과일 것이라는 얘기다.예를 들자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그의 언급이다.
그는 얘기 첫 머리에 ‘이산가족이 많다’고 했다. 월남자 가족임을 숨기고 살던 사람들이 나서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는 월남자 가족을 요감시대상으로 분류하여 적대시하던 정책의 완화를 뜻하는 것일 수가 있다. 그 바탕 위에서, 이산가족 실태 조사쯤은 벌써 끝내 놓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산가족이 많다’는 말도, 그 사이 남ㆍ북회담에서 ‘북에는 이산가족이 없다’고 잡아 떼던 것과는 판이하다.
그는 또 준비없는 이산가족 대책은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 수가 있다’고 했다. ‘너무 동포애만 강조해도 안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듣기에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산가족 문제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시각이다. 이산가족 문제가 자칫 체제혼란마저 가져 올 수가 있다는 정치적인 관점이다.
실제로 98년 4월 대북 비료지원 문제를 논의한 베이징 차관급 회담에서 북은 이산가족이 정치문제임을 강조했었다. 비료는 경제문제요, 이산가족은 정치문제이기 때문에, 이 둘을 병행 논의하는 것은 정경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회담을 파탄시킨 것이다.
이런 경위에 비추어 보면, 이번 8·15 가족상봉은 아주 획기적이다. 북의 정책전환이 돋보이지만, 김 위원장이 방북 언론사장단에게 밝힌 복안은 아직 조심스럽다. 그가 확언한 것은 연내 두 차례 가족상봉이 있으리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8·15 가족상봉에서 우리가 다시 확인한 것은 100명, 200명 단위의 이벤트성(性) 가족상봉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방도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 만남의 상징성과 감동이 크더라도, 결국은 일과성 정치행사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원칙은, 인도주의적인 문제는 인도주의적으로 풀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바탕위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 외에 해답은 있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산문제 해결은 ① 생사확인 ② 상봉 ③ 재결합이라는 여러 단계를 포함한다. 문제 해결의 제1장은 생사확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 과제는 한 단계를 뛰어 넘는 상봉이 아니라, 소식을 상통하는 통신(通信)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만으로도 이산고통의 반을 덜 수가 있고 수적(數的)제한이나 비용부담의 걱정도 덜 수가 있다. 방송을 통한 통신도 가능할 뿐 아니라, 98년 북이 설치한‘이산가족 주소 안내소’의 취지와도 상통한다. 그 만큼 남북 합의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북의 처지를 헤아리는 일이다. 북에서 보아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실리(實利)와 부담의 양면이 있다면, 실리를 극대화하고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 이 경우 통신은 북으로서도 부담을 견딜만한 문제 해결 단계에 속한다. 실리의 극대화는 이산가족간 송금을 가능케 하고, 구호품 등의 지정기탁제를 정비, 활성화하는 것으로 달성할 수가 있다. 이로써 우리는 북한 동포를 돕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도를 확보할 수가 있다.
김 위원장의 말대로, ‘준비 없이’‘동포애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먼저 통신을 터서 핏줄을 통하고, 돈줄을 잇는 것이 그 첩경이라 생각한다.
김창열 본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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