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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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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

입력
2000.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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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말이 있다. 유럽 대륙에서 한창이던 1차대전을 지켜본 미국 상원의원 히럼 존슨이 남긴 명언이다. 이후 전쟁때마다 흔히 인용되는 격언이 됐고, 여러 언론인과 학자들이 전쟁과 전쟁보도에 관한 책 제목을 ‘첫 희생자’(The First Casualty)라고 붙였다.전쟁에서 진실을 유린하는 거짓선전의 대표적 전형은 적의 잔혹성과, 이를 응징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1차대전때는 ‘벨기에 점령 독일군이 요람의 갓난아기들을 공중에 던진뒤 총검으로 꿰는 장난을 했다’는 영국의 거짓선전이 국민의 전쟁의지를 북돋웠다.

그러나 실제 1차대전의 잔혹상은 참호전이 중심이었던 전쟁터에서 극에 달했다. 양측은 독가스 등 잔인한 살상무기를 무차별 사용, 젊은 목숨 수백만이 지푸라기처럼 스러졌다.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맨체스터 가디언지 편집장 C.P. 스코트에게 ‘국민이 진실을 안다면, 전쟁은 내일 당장 끝날 것’이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냉전종식에 따라 강대국의 열전마저 역사의 유물이 된듯하던 90년 돌출한 걸프사태는 온통 ‘거짓말 전쟁’이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명분을 둘러싼 논란이 본격화할 틈도 없이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병원 신생아실의 인큐베이터에서 미숙아들을 꺼내 팽개쳤다’는 1차대전식 거짓선전이 난무했다.

이라크를 악마화한 흑색선전은 미 의회 청문회에도 올랐다. 쿠웨이트 소녀가 ‘미숙아 학살’목격담을 눈물로 증언, 부시 행정부가 무력응징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소녀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고, 조작극은 부시의 전직참모들이 경영하던 홍보회사가 꾸민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민간인 방공호를 오폭하고도 ‘후세인이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삼았다’고 욕했고, 대부분 언론이 이를 추종했다. 제대로 된 언론인들은 ‘언론이 미디어 전쟁의 인간무기로 전락했다’고 개탄했으나, 대세를 바꾸진 못했다.

옛 얘기가 장황한 이유가 있다. 지난 주말 유엔 국제전범재판소가 지난해 유고 코소보에서 자행된 ‘집단학살’의 진상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코소보 무력개입을 주도한 미국과 영국은 대규모 공습을 전후해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 주민 수십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전범재판소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조사팀이 집단학살 매장지로 지목된 수백곳을 파헤쳐 일일이 검시한 결과, 주검은 3,000명 미만으로 확인됐다. 그것도 학살 증거는 거의 없고, 알바니아계 코소보 독립군(KLA)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추정됐다.

나치식 집단학살을 막는다는 전쟁 명분부터가 거짓에 근거했던 것이다. 그 전쟁에서 나토는 내전때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도 다시 ‘인간방패’설 등으로 호도했다.

현장취재가 봉쇄돼 코소보 국경에 모인 TV 기자들은 본사에서 보내준 나토 발표문을 그대로 복창했다. 숱한 목격자도 KLA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KLA는 미국 CIA가 내전 이전부터 훈련시킨 사실이 베테랑 전쟁 전문기자들의 추적으로 밝혀졌다.

영국의 대기자 필립 나이트리는 이렇게 확인된 전쟁의 숱한 거짓을 저서 ‘첫 희생자’ 증보판에 담아 올초 내놓았다. 전범재판소와 민간인권기구들은 이를 뒤늦게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언론인 존 필거의 말처럼,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서 거짓이 지배하는 대세를 따르는 순한 양(羊)이 되면 평화와 진정한 정의는 멀어진다.

걸프전과 코소보 전쟁을 주도한 세력은 정의와 인권을 외쳤지만, 목적은 냉전종식후 ‘신국제질서’의 주도권 장악과 나토 군사동맹의 유지·확대였다.

이 땅의 보수언론과 학자들은 이 전쟁들과 북한 핵위기 등에서 정의를 위장한 전쟁 메시지를 추종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국제질서와 군사동맹을 주도할 게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평화 메시지를 좇는 분별력과 참된 용기를 가져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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