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올림픽이 1달이 채 남지 않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언론에서는 금메달 지상주의로 여론을 몰아 가기에 한창이다. 금메달 메카시즘은 올림픽이 가까워 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스포츠에 대한, 올림픽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군사독재시절과 국민정부와 흡사 닯은 꼴이다.과거, 정확히 표현하면 서울올림픽 까지 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국제스포츠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은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했다.
수출이 국가경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우리로서는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려야 했고, 스포츠는 주요 수단이었다. 또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스포츠는 총없는 전쟁이었고, 스포츠의 승패는 체제의 우월성과 직결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스포츠가 국위선양과 체제대결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은 이제 폐기되야 할 시점이 되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건강과 여가선용의 수단으로 스포츠를 인식하면서 충분한 시설, 지도자,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 체육주권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이 구 동구사회주의 국가의 스포츠 모델과 흡사하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국가의 강력한 지원에 의해 엘리트체육이 육성되는 국가아마츄어리즘을 추구했던 동독의 경우 선수들은 선수촌 합숙이 요구되었고, 국제대회 입상 선수는 평생을 보장받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선수들은 인격체가 아닌 기록제조기 일뿐 이었다.
이러한 구동독과 한국의 체육이 비유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10위권 목표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는 분명 서울올림픽 이후 엘리트체육 분야는 세계 상위권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어린 선수들의 희생과 땀의 대가이든,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든 올림픽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감격적인 순간을 모두가 보고 싶어한다.
문제는 엘리트 체육의 근간이 되는 생활체육과 학교체육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데 있다.
가령 인구 백만명에 불과한 독일 쾰른시의 체육관 210개, 공공수영장 150여개라는 수치는 우리 사회의 전체 시설 규모와 맞먹는 것이 한국생활체육의 현주소이다.
학교체육시설은 더욱 심각하다. 정상적인 학생들의 체육수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체육관이 필수적이지만 아직 학교체육관 보유율은 5%에 불과하다. 학교체육의 파행은 생활체육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낳게 된다.
학창시절을 동안 운동기능을 습득하지 못하거나, 운동에 취미를 얻지못하면 졸업후 생활체육에 참여하는데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되었다.
엘리트체육지상주의 속에 엘리트ㆍ생활ㆍ학교체육의 불균형이 초래하는 역기능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최근 ‘장희진 선수 파동’은 그 단적인 예이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고자 했던 장선수에게 가해졌던 국가자격 박탈은 선수의 개성과 인격은 뒷전이고, 오로지 선수는 메달제조기로만 인식하는 관계 당국의 인식을 보여 주었다.
특히 엘리트체육의 발전이 발전하면 생활체육과 학교체육이 저절로 발전한다는 체육 기득권 집단의 논리는 국민과 체육인을 기만하는 처사이다.
엘리트체육의 문제점을 우려하는 것은 비단 필자 뿐만이 아니다. 지난 6월 장희진 선수 구명을 위한 전국체육학과 교수 서명운동을 통해 한국체육이 변해야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장희진 선수 징계 철회와 생활체육과 학교체육의 근본적인 발전 대책을 요구하는 체육계 최초의 서명운동은 단 이틀 사이에 전국 51개 대학 231명의 교수가 동참함으로써 한국체육의 변화 욕구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관계 당국은 서명운동이 주는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째, 대다수의 체육인들은 현재의 기형적 체육구조가 하루 빨리 개선되야 한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러한 요구는 국민들의 요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보는 스포츠’ 보다 ‘하는 스포츠’를 원하고 있다. 셋째, 당장의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기 보다 체육활동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국제대회를 앞두고 되풀이 되는 금메달 메카시즘은 제고되야 한다.
한국이 세계의 무대위에 있고, 남북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체육패러다임이 구축되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체육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육주권 패러다임을 체육인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대한의 건아들이 올림픽 시상대에서 올라있는 있는 광경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가 직접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흘리기를 바라고 있다. 금메달 메카시즘은 이번 시드니 올림픽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든든한 생활체육과 학교체육의 기반위에서 획득하는 금메달이야 말로 우리 국민 모두의 값진 성과물이다. 소수보다는 다수를 지향하는 풀뿌리 체육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형 스포츠클럽을 제안한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유럽 스포츠 클럽을 응용한 일본형 스포츠클럽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며, 그 결과 한국보다 40배나 많은 유소년 축구팀을 보유하게 되었다.
스포츠클럽을 통한 풀뿌리 체육의 확립은 시민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여가생활이 이루어 지는 시민사회 공간에서 체육주권 운동은 새로운 방식의 시민운동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올림픽 직후에 시작했어야 할 체육주권 운동이 때늦은 감이 있지만,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변화된 시대의 조류에 힘입어 비로서 시작할 때가 되었다. 풀뿌리 체육은 체육의 민주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안민석 중앙대 사회체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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