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덕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15일 평양공항에서 숙소인 고려호텔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나(김성옥·金成玉·72·대전 중구 중촌동)의 머리 속은 온통 50년 전 아장아장 걷던 딸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들어선 고려호텔 단체상봉장. 순간 누군가 갑자기 달려들어 덥석 끌어안더니 “언니! 누님!”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여동생 성자(69)와 춘자(56), 남동생 성갑(53)이었다. 첫 눈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나보다 늙고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틀림없는 동생들이었다. 얼마를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비벼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르겠다.
‘아참, 딸 아이는 어디 있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어보는데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아! 얘가 순덕이구나.’ 세 살때 헤어졌건만 제 아버지를 닮은 것이 영락없었다. 심장이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니가… 순덕이… 맞지?” “네…, 오마니….”
그 애였다. 막내동생 성갑이와 한 해에 태어난 딸 리순덕(53)이었다.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이 어미가 널 보살펴주지 못했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고개 숙인 딸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원래 말이 없는 탓일까. 아니, 어미를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 큰 탓이겠지. 동생들에게 물으니 내가 월남한 뒤 제 아비도 전쟁통에 어디론가 사라져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그 맺힌 한을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평양의 첫날 밤은 그런 회한에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침대에 들자 뭔지 모를 설움과 함께 50년 전 그날의 기억이 생생히 밀려왔다. 1950년 9월8일 새벽. 함경남도 원산 앞바다. 전날 밤새도록 “쿵” “쿵”하며 함포사격을 퍼부은 미군함은 피란민 7,000여명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나도 있었다. ‘며칠 지나면 돌아갈 수 있겠지…’하는 생각에 배에 오른 것이 세살배기 순덕이와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해방 직전 열여섯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오빠 친구와 결혼해 낳은 첫 아이였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개별상봉 때도 순덕이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 어미를 용서하지 마라. 그래,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나를 욕해라….” 평양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7일 오전 순덕이는 마침내 내 손을 꼭 잡았다.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오마니! 저 이제 오마니를 미워하지 않습네다.” 서로 50년 한이 얼음 녹듯 풀리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이날 오후 단군릉 관광과 대동강 뱃놀이는 즐겁고 행복했다. 잡념 탓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평양거리도 환하게 다가왔다. 거리는 온통 녹색인 것이 인상깊었다. 수많은 아름드리 나무에 넓게 펼쳐진 잔디는 맑은 공기와 어울려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북측 안내원들은 너무 친절했고 퇴근길의 평양시민들은 표정이 밝아 보기 좋았다. 남한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동생들이 탈주범 신창원과 그 사람이 입었던 티셔츠가 남한에서 유행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어 놀라웠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쓰고 간 모자와 한복을 여동생들에게 벗어주었다. 동생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이런 모자는 처음 보는데 이북에서 새 유행이 될 지 모르겠다”고 했다.
18일 고려호텔 앞. 만남은 너무 짧았다. 울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기약없는 생이별이라니…. “오마니! 언니! 누님! 가지 말아요. 여기서 같이 살아요.” 딸과 동생들은 울며불며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몸조심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러면 또 다시 만날 날이 분명히 있을 거야.” 억지웃음을 지으며 돌아섰지만 피가 몸에서 다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평양의 3박4일은 아직도 꿈만 같다. 그러나 과연 또 만날 수 있을까. 7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다시 상봉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편지왕래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동생들이 깜빡 잊고 온 부모님 사진이라도 받아볼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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