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계동 옛 창덕여고 자리의 헌법재판소 정원은 운치가 있었다.오래 전부터 거기 서 있는 천년기념물인 백송을 중심으로 군데군데 대나무 숲이 있어 바람이 불면 댓잎들이 사각사각 시원한 소리를 냈다.
12년전 헌재가 문을 열 때 옮겨 심은 나무들도 크게 자라 그늘이 짙었다. 나무 사이에서는 수백 마리의 매미들이 울어제켰다.
아파트 벽에 달라붙어 자발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야 시끄럽지만 나무 그늘 속에서 듣는 매미소리는 시원하기만 했다.
운치있는 정원에 의자를 내놓고 인터뷰를 했다.
만난 사람은 다음 달 14일 6년 임기를 마치는 김용준(金容俊·62) 헌법재판소장이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시원하게 진행한 인터뷰였다. 그도 할 말은 시원하게 해주었으니.
그는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법대에 입학, 3학년 때 고시(9회)에 수석합격했다. 이듬 해인 1960년에 임용, 지금까지 꼭 40년간 법관생활을 해왔다.
사법부 발족 이후 여태껏 그만큼 법관생활을 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재조(在朝)법조인 누구보다 먼저 임용됐으니 그가 퇴임한다면 결국 또 한 사람 원로가 현장에서 물러나는 셈이다.
그래서 질문도 헌법재판소장 직에 관한 것보다는 법조생활 전반에 대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퇴임에 따른 감회가 없을 수 없겠다. 이렇게 정원이 좋은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섭섭하실 것 같고.”허튼 소리를 섞어 퇴임의 변을 요청하자 그는 “인터뷰는 시험보는 것 같아서 항상 긴장되더만”이라고 운을 뗀 후 “지금까지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생각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그는 다리를 심하게 전다. 어릴 때 한동안은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명문 고교 진학, 검정고시를 통한 법대 합격(1957), 3학년때 3,000명 고시응시자 중 수석합격(1959), 법관 임용(1960), 법원장(가정법원·1984~1988), 대법관(1988~1996)을 거쳐 마침내 헌법재판소장에 임명(1994.9)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눈물이 있었을까마는 그는 “모든 것이 사회의 도움 때문”이라며 “앞으로는 그 혜택을 갚아야겠다”고 말했다.
-혜택이 아니라 쟁취한 것 아닌가?
“사회가 나를 받아주었으니까 쟁취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우선 비행청소년 선도와 장애인돕기에 시간을 많이 낼 생각이다. “비행청소년 선도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
재범을 방지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본인의 자활을 도울 수 있으며, 선도의 결과로 월급장이라도 된다면 한 푼이라도 세금을 낼 터니 나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힘이 있을 때까지는 청소년 선도에 나서겠다.”
“우선은 경기 양주에 있는 ‘나사로 청소년의 집’을 수시로 찾을 거요”라고 말하던 그는 갑자기 “이봐요, 나보다는 거기 운영하는 목사님을 인터뷰해봐. 자기 자식 말고도 비행청소년을 60명이나 데리고 살고 있어. 그 목사님 이야기가 ‘신창원이 잡는 데 쓴 돈의 몇 분의 일만 미리 청소년 선도에 썼더라면 신창원사건이 안 생겼을 것’이라고 그래. 나도 생각 안 한 걸 알고 있어. 나보다 훨씬 훌륭해”라고 말했다. 장애인돕기와 관련해서는 “가급적 장애인 행사에는 모두 참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사람이 가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힘이 되겠지. 가능한 한 물질적으로도 돕겠지만.” 변호사 개업은 안 하느냐고 묻자 “지금 개업해서 뭐 하겠어”라는 대답이었다.
퇴임후 계획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부터 끝날 때까지는 주로 법과 국민, 법조인과 국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먼저 ‘법조계 후배, 특히 판사들에게는 재판관으로서의 사명감을 느껴줄 것’을 당부했다.
“사명감을 느껴야만 자긍심이 생기고 조심도 하게 된다. 재판제도는 국민을 위한 것이지 법관이나 정치인, 혹은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국민의 편에서, 국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그러더니 “당부 치고는 너무 추상적인가? 하지만 추상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아?”라고 자문자답했다.
그가 1963년 서울지법 판사일 때 ‘반5.16’세력의 한 축이었던 송요찬장군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과감히 석방판결을 내린 일은 한동안 회자되었다.
박정희군사정권의 서슬이 한창 시퍼렇던 시절에 법관생활 3년째, 만 25세의 초년법관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게 기자에게는 너무 대단해 보였다.
“요즘 법관 가운데도 그런 소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보는가”고 물었다.
“옛날 일인데…”라고 기억을 더듬던 그는 “아무리 검토해도 구속감이 아니어서 석방을 결정했던 것”이라며 “당시 대구지방검찰청장이던 분이 본인 직함과 이름이 또렷한 공개엽서에 ‘참 잘했다’는 글을 써서 보내준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신’판결을 내린 판사에 반공개적으로 격려를 보내준 ‘소신’검찰간부가 그런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 “요즘 법관도 그렇게 판결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은 법관들이 정치적 압력이나 경제적 회유로부터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 같은데 절대다수는 그런 압력과 회유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론의 압력, 소위 ‘국민정서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간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본다.
재판관은 여론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도 사법권 독립의 요체임을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그런 문제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국민을 대하지 않는 법조인이 많은 것이 더 문제라고 말을 이어갔다.
국민의 편에서 이해하려는 마음이 ‘열린 마음’이라고 말한 그는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법관이 있는 것은 법관선발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법관지원자 개인의 개성은 따지지 않고 성적순으로만 법관을 임용하고 있으니 국민을 위한 판결이 아니라 법조문만 해석한 판결이 나오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지금 현실이 성적순으로 뽑을 수밖에 없다면 임용 후에라도 국민을 위해 마음을 열 수 있는 법관이 될 수 있도록 재교육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원 접수창구에서 소장을 직접 접수하면서 국민의 고충을 이해해본다든가, 신문사에서 기자 교육을 몇 달 받으면서 세상이 법관을 어떻게 보고 있는 가를 경험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법관으로서 그는 진보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편이다. 그와 가까운 어떤 이는 “장애자로서 직접 맞닥뜨려야 했던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다 그런 성향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기자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글쎄, 나 스스로는 진보냐 보수냐를 따져보지 않았는데…. 그러나 남이 안 다루는 것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진보라고 할 수도 있겠지.”대법관 시절 그는
‘생수를 시판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최근 어떤 잡지사는 그의 이 판결을 ‘해방 이후 분야별 20대 판결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헌법에는 보장되었지만 행정편의주의에 밀려 허울뿐이었던 ‘행복추구권’이 그의 이 판결로 ‘실체화’되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수도물을 불신해 생수를 사먹고 있었는데도 당국은 국민위화감이 조성된다는 등의 이유로 생수시판을 금지하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기자는 행복추구권의 요체는 국민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남이 안 다루는 것을 다루는 것은 창조행위다. 재판관에게는 법의 해석 및 적용과 함께 이를 통해 법을 창조해야 하는 역할도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뭔가, 헌법이 사법권 독립을 보장하고 있는 취지는 뭔가를 생각하며 판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터뷰 동안 별로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하지 않던 그였지만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생수시판허용 판결이 하나의 창조행위였다는 확신을 보였다.
법을 잘 모르는 기자로서는 내내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경청해야 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법제도가 있는 한 그런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본인과 하늘만 아는 것이다.
재판관은 다만 있는 증거를 근거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다. 어느 재판관은 무죄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에게 ‘법이 좋아 무죄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다. 법 때문에 유죄가 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판결은 그런 입장에서 내려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마디 더 한다면 법관은 자신이 유죄라고 판결한 사람이 상급심에서 무죄가 됐다면 반발하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법관은 그런 자세로 있어야만 한다.”
-법에만 따라 판결을 내린다면 항상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 아닌가.
“당연하다.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판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든 법관은 억울한 사람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국민들도 그런 경우 재판결과가 잘못됐다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재판관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해 판결을 했는가를 따져야 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 그 말을 ‘억울한 사람을 줄이는 게 법제도이고 재판이다’고 요약해도 되나.
“그렇다.”
● 헌법재판소장으로서의 회고
이밖에도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2기 헌법재판소 소장으로서의 자평, 가장 보람있다고 생각되는 판결(결정),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바람직한 관계등등에 대해서다.
그는 과외허용결정이 가장 보람있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당장에는 국민부담이 늘어나는 등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교육문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도움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근원적 기능과 목적이라면 이 결정이야말로 그런 목적에 가장 부합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관계설정에 관해서는 선진국 중 헌법재판소가 없는 곳은 미국과 일본뿐이라는 사실, 서유럽국가에 이어 동유럽국가들도 헌법재판소를 연이어 설치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헌법재판소의 기능은 갈수록 막중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자신의 임기만료와 함께 새로 구성될 3기 헌법재판소의 면모다.
“다른 건 몰라도 헌재와 대법원에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아야 되는데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발족후 12년간 축적된 헌재의 ‘노하우’가 자칫하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미국은 사법제도가 200년이 더 됐지만 대법관은 107명만 배출됐으며 이중 10여명은 30년 이상 재임했다는 사실에서 뭔가를 배워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나라가 아직 법치국가가 못 된 것은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고, 만든 법은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실록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도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어”라는 개탄이 뒤따랐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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