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곱던 새색시 얼굴엔 모진 세월의 흔적이…인공기가 선명한 비행기에 들어선 순간까지 내 마음은 두 갈래였다. 나의 새 색씨 이옥녀, 그리고 귀여운 한돌배기 딸 현실이….
50년간 북한이라는 말만 나와도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남편과 애비 구실을 못한 미안함, 서울의 가족에 대한 짐스러움 때문에 마음 속으로 애써 외면하려 한적도 있었다.
구름사이로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두들 창문으로 밖을 보느라 야단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50년전 헤어질 때의 느낌을 느껴보기 위해 심호흡을 해봤다. 결혼한지 1년반만에 인민군에 입대하던 날, 전쟁의 포화, 그리고 인천에서 국군에 포로로 잡히던 장면이 어제처럼 스쳐갔다.
“북에서 이미 결혼한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걸.” 나를 보내며 건넨 남쪽 아내(최연희·72)의 농담도 귓가를 맴돌았다.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하는 도중 바라본 50년 사이 휑뎅그렁한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고향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기차를 타고 찾아왔던 평양은 기와집, 초가집이 즐비하고 사람들이 넘쳐난 북적북적한 도시였는데….
강변에 기와집은 사라지고 아파트와 높은 건물들만 눈에 띄었다. 씁쓸했다. 아내도 이처럼 많이 변해 있을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어색하지는 않을까. 한번도 눈에 지운 적이 없는 아내의 얼굴이 이날은 왠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후 4시. 드디어 만날 시간이다. 72세가 됐을 아내와 51세라는 딸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난 시선을 둘 곳을 잃어 함께 자리한 장조카 김병옥(75)을 먼저 쳐다봤다. 이윽고 파란 한복과 분홍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북녘 아내와 딸이 눈에 들어왔다. 둘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나올 뻔 했다. 반갑기도 했지만 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남아있어 마음이 아파왔다.
그냥 “보고싶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둘은 6·25후 15년간 나를 기다리다 전사통지서를 받았다고 한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옛 일을 회상하면서 얘기를 했다. 출가한 딸 현실이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은 준비해온 선물을 꺼내놨다. 치마저고리와 금반지, 옷가지 그리고 돈을 준비했다. 나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선물마련이 쉽지는 않았지만 남들만큼은 준비하려고 애썼다. 가족들은 국가에서 준 선물이라며 담배와 술, 도자기를 내게 전했다.
17일 아내를 다시 만났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야기 소재도 늘어났다. 그리고 헤어져야 했다. 부부유별(夫婦有別) 시대에 연을 맺어서 그런지, 내 성격 탓인지…. 평양에 있는 동안 여느 부부처럼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어깨동무 한 번 해보지 못했다. 힘없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내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돌았다.
냉정하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귀한 시간을 너무 맹물처럼 보낸 것은 아닌가. 새로운 죄책감에 마음이 다시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오후에는 단군릉을 찾았고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단군릉의 엄청난 규모는 놀라울 뿐이었다. 280여계단에 올라가기가 벅차 그냥 안가겠다고 했더니 북측에서 차를 준비해 줬다. 옥류관 냉면국물을 들이키니 예전 그맛이 느껴졌다. 도시는 싹 바뀌었지만 평양의 육수맛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아 반갑기만 했다.
18일 해가 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북녘에서 3일간 가족들을 만나면서도 손 한번 잡아보지못한 서운함이 아직도 가슴속에서 아른거린다. 이번 평양방문을 통해 북쪽 가족들도 내 살이요 내 피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내 살곳은 역시 서울이라고 생각하니 이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김사용(金士用·74·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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