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에 휩싸인 불암산이 경쾌한 음악소리에 번쩍 눈을 뜬다. 올림픽개막 D_30일인 16일 새벽 6시 태릉선수촌 종합운동장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선수는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3㎏의 김봉석(23). “1등으로 운동장에 나오는 일이 올림픽 백일기도”라며 졸린 눈을 비빈다.올림픽개막 D_100일부터 ‘훈련에 미치는 사람만이 시드니에서 값진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선수들에게 당부해 온 장창선 태릉선수촌장은 ‘맑은 마음으로 시드니에 가자’며 정신력을 강조한다. 새벽운동에서 가장 애처로워 보이는 레슬링선수들.
400m 트랙 12바퀴를 돌고 난 뒤 곧바로 로키걷기, 팔점프, 90도 토끼뜀 등 고강도 체력훈련으로 다시 트랙에서 땀을 쏟는다. 절대 두 어깨를 바닥에 대서는 안될 레슬링 선수들인데 하나 둘씩 트랙에 드러눕는다. 세계 일인자인 심권호마저 배가 아프다며 일그러진 얼굴로 트랙에 나뒹군다.
수영대표선수들은 오전 10시부터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매주 화·목요일 오전은 휴식이었지만 지난 달 아산기 대회에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탓에 최근“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오후 훈련을 하라”는 정부광감독의 청천벽력같은 엄명때문이다.
입촌한지 겨우 2주일된 한국선수단 최연소인 막내 장희진(14·자유형 50m, 100m)은 50m코스 8번을 1세트로, 오전에 3세트를 끝내야 하는 지구력훈련에 열심이다. 자기 최고기록인 28초에 2초 모자라는 30초를 유지해야 하는데 왠일인지 2세트 들어 계속 2초가 늦어 권상원코치에게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희진이의 맥박이 무려 193까지 올라가자 마음 약해진 권코치는 한세트 연습을 줄이기로 했다. 귀가 번쩍 뜨인 희진이는 철부지 중학생답게‘만세!’를 외치며 좋아라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든다.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는 최고령 맏형이자 한국팀주장 이상기(34·펜싱 에페)는 오전 마인드컨트롤을 배운다.“올림픽이 닥치면 잠도 잘 안올 것 같아” 심리적 안정을 얻기위해서다. 그는 “대표생활의 마지막이 될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펜싱의 올림픽 노메달의 한을 풀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피와 땀의 오전훈련이 끝난뒤 갖는 꿀맛같은 점심식사. 이날은 특별히 체력에 좋다는 장어덮밥, LA갈비 등 군침도는 음식들이 나왔다.
하지만 체중조절을 해야 하는 체급종목선수들은 그저 입맛만 다시며 역도 무제한급 김태현의 즐거운 식사광경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훈련에 지친 선수들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3시부터 또 다시 강도높은 훈련이 기다린다. 30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선수들의 땀과 열정이 어우러진 레슬링, 유도 등 투기종목 체육관 안은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막힌다.
막내 희진이는 고된 훈련이 끝난 뒤에도 책상앞에 앉는다. 훈련때문에 밀린 방학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 하지만 피곤때문인지 숙제를 하다 머리를 책상에 파묻기 일쑤다. 이상기 주장은 저녁식사 후 모처럼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외출해 집에 들렀다.
아들 준호와 주형이는 오랜만에 본 아빠의 팔에 좋아라 매달린다. 빡빡한 훈련일정에 가장노릇 한번 제대로 못하는 그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다시 한번 든다. 하지만 “아빠, 오늘 자고 가”라며 조르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다시 선수촌으로 어려운 발걸음을 옮긴다.
밤9시. 선수촌은 어둠으로 뒤덮혔다. 하지만 태권도대표선수들은 휴식까지 반납하며 야간훈련에 여념이 없다.
여자대표의 훈련상대로 남자대표들이 나섰는데 68㎏급의 신준식은 인정사정없이 여자대표 이선희(67㎏급)의 복부에 강한 발차기를 적중시킨다. 선수들 기합소리에 밤은 더욱 깊어가고 어느새 관리인은 D-30일 간판을 D-29일로 바꿨다. 선수촌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준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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