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의 감동은 첫 날에 이어 16일에도 계속되었다. 아니 내일도, 다음 달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남과 북 쌍방에서, 15년 전의 100명을 포함, 겨우 300명이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했을 뿐이다.이번 8·15 교환방문엔 남측의 경우 7만8,000명이 지원한 가운데 선발된 인원은 고작 100명이다. 한번에 100명씩 만나서는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이산 1세대는 내일을 장담할 수가 없는 70세 이상의 고령자만 26만명이나 된다. 상봉이 계속돼야 하고, 폭을 넓혀야 할 이유다.
많은 이산가족들은 9월과 10월을 기대하면서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꿈같은 상봉장면을 눈물 훔치며 지켜 보았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육의 정은 그 어떤 이념이나 체제도 갈라놓을 수 없음을 깨닫기도 했다.
이 감격적인 장면은 전세계에 소개되었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전 세기 냉전의 잔재가 엄존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미국인 교수는 통곡의 ‘상봉’장면을 “기쁨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반세기 참았던 슬픔이 터진 것”이라고 보았다.
코엑스에서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는 “기자생활 30년동안 이처럼 기쁨과 놀라움과 눈물이 뒤섞인 장면은 처음”이라고 흥분된 심정을 토로했다. 중국 신화통신의 한 기자도 “이런 감격적인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중인 양측 이산가족들은 이틀 째 날,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개별 상봉의 기회를 갖고 첫 날 다 못나눈 응어리진 한을 풀었다.
부모가 남긴 유언과 유품을 전하는 숙연한 장면도 있었다. 항공편으로 5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50년이나 돌아가야 했던 이들에게 있어 분단 반세기는 몸서리치는 세월이고 돌이켜보기도 싫은 과거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자 잠시 혼절했던 남녘 노모는 다시 깨어나자 그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이제는 가지 말고 이대로 살자”고 애원했다.
예순이 넘은 북 예술계 여성박사 1호라는 김옥배씨에게 남녘 어머니는 30여년 전 딸의 혼기에 맞춰 장만했던 혼수용 반지를 손수 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어떤 상봉도 이만한 감동이 없는 장면은 없어 보였다.
남과 북은 이 감격, 감동만으로도 벌써 분단 반세기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상봉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가느냐 하는 점이다.
50년이나 참고 기다린 이 소중한 만남을 앞으로도 이어가기 위해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상봉’은 남과 북의 국력을 비교하는 자리가 아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일은 그 어떤 것도 불필요하다. 차분하게 양측이 모두 승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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