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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산상봉을 보며

입력
2000.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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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치하루 요미우리 서울지국장쉐라톤 워커힐 호텔의 프레스센터 대형화면에 갖가지 상봉이 방영됐다. 서울의 김동만(69)씨 모습도 있었다. 울부짖으며 북에서 온 형, 김동진(74)씨를 끌어안는 김동만씨를 보면서 나는 6일전 그를 취재하며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형을 만나면 ‘형님 열심히 사셨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운명의 장난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장남인 김동진씨는 보성전문학교 재학 당시 좌익운동에 참가했다. 한국전쟁의 혼란 중 북으로 향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일가족은 ‘빨갱이’혐의가 씌워졌고 아버지는 투옥돼 사망했다.

김동만씨는 자동차정비공장에서 일하며 가계를 책임졌고 세 누이동생에겐 고등교육을 시켰다. 종업원 50인의 공장 경영자까지 됐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떠받친 것은 김동만씨처럼 이산이라는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근면하게 일한 사람들이었다. 남에서 북을 방문한 이산가족들이 시계나 옷, 달러를 선물로 갖고 간 것은 남북 경제력의 차를 드러낸 것이다.

나는 전에 베를린 특파원으로 동서독 통일과정을 취재했다. 동베를린에 들어간 것은 1989년 11월9일에 베를린장벽이 붕괴하기 이틀전이었다. 당시 동독으로부터 서독으로 많은 시민이 탈출하고 있었다. 보다 여유있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들을 월경으로 내밀었다.

시장경제의 나라가 풍요롭고, 계획경제의 나라가 정체하고 있다_는 대비로 보자면 당시의 동서독과 지금의 남북한은 비슷하다.

다른 점은 당시의 동독 국민들은 동이 서에 비해 가난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데 강한 불만을 품고 공공연히 표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독의 여러 도시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빈발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여행의 자유를’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서독이 1970년 첫 동서독 정상회담 이후 계속 노력했던 목표의 하나가 양국간 인적 왕래의 확대였다. 동서독 이산가족은 병문안 등 인도적 이유가 있으면 상대방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동독의 노인은 쉽게 서독에의 여행이 가능하게 됐다. 1970년대 후반에는 동독으로부터 연간 100만명 이상이 서독을 여행했다.

극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 감동하면 할수록 희망하면서도 상봉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엾다. 남한에서 방문단 참가를 신청한 7만 5,900여명 중 선발된 사람이 100명이라는 것은 너무도 적다.

북한에서 온 이산가족들은 마이크를 들이대면 “위대한 김정일장군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한 언론사 사장단에게 이산가족 상호방문을 9, 10월에도 하고 내년에는 집에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실현된다면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상봉은 본래 정치에 좌우돼서는 안되는 인도적 문제다. 국가지도자가 주는 은총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에 속하는 것이다.

서독이 일관했던 정책은 동서의 교류를 확대, 독일 민족의 동일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을 실현하는 노력이었다. 그랬기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의 가능성이 생겨났을 때 주변국가는 통일을 지지했던 것이다.

한반도가 처한 상황은 동서독의 경우와는 다르다. 하지만 독일이 ‘민족’ 통일만을 추구하지 않고 ‘민족’과 ‘보편적 인권’을 수레의 두 바퀴로서 밀고 갔던 점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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