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점심 식사후 세편의 쪽지 시를 들고 나섰다. 화장실 입구에 붙어있는 시를 바꿔 붙인 뒤 하행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승강장에서 새 시로 바꾸기위해 붙어있는 시를 조심스레 떼어내자 작은 쪽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매일 좋은 시 감사합니다. 출퇴근 때마다 읽고 갑니다.”작고 예쁜 글씨다. 기분이 상큼하다. 미소를 머금고 다시 상행선 승강장으로 간다.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시를 읽고 있다. 뒤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바꿔 붙인 뒤 사무실로 올라가 떼어온 쪽지 시를 상자 속에 넣었다. 소요 시간은 10분 정도. 내가 바쁜 일과중에도 이 일을 하는 것은 3년전 대전의 한 병원에 입원해있던 친척을 문병간 게 계기가 됐다. 병실 문 어른 눈높이에 예쁘게 쓴 작은 쪽지 시 하나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내용도 좋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쳤기 때문에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 근무하고 있었다. 신림역 대합실 ‘만남의 장소’에는 승객들의 만남과 약속을 돕기위해 메모판이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이미 호출기와 휴대폰이 많이 보급돼 이용자가 거의 없었고 메모판은 낙서판으로 전락된 상태였다.
메모판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하던 나는 대전 병원의 쪽지 시를 떠올리고 메모판에 쪽지 시를 써 붙이기 시작했다.
승객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승강장과 화장실에도 붙였다. 독자는 자꾸 늘어 대충 1,000여명으로 추산됐다. 시를 바꿔붙일 때 가끔씩 쪽지 뒤에서 발견되는 독자들의 쪽지 편지, 그리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시민들의 격려는, 지난해 2월초 4호선 미아삼거리역으로 온 후에도 계속 쪽지 시를 써 붙이게 만들었다.
매일 세편의 시를 바꿔 붙이기 위해 그동안 50여권의 시집을 구입했다. 발췌한 시만도 1,000여편. 쪽지는 한번 사용한 광고지나 달력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 것으로 시는 뒷면에 적는다.
독자수는 신림역보다 적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나의 작은 정성으로 매일 많은 시민들이 기뻐하니 기분이 참 좋다. 왜 귀찮은 일을 만들어서 하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 쪽지 시는 승객들과의 무언의 약속이 돼버렸다.
/이승철 서울시 지하철공사 미아삼거리역 역무사무소장
독자에세이에 원고가 실린 분께는 문화상품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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