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민족이 통곡하고 눈물흘린 50년만의 집단상봉은 분명 감동의 드라마가 아니다. ‘장명수 칼럼’이 이를 잔혹한 드라마, 세계에 고개 들 수 없는 참담한 반인륜 드라마로 규정한 것은 옳다.드라마란 표현도 사실 마땅치 않다. 이거야말로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변고, 어처구니 없는 참사가 아닌가. 그 황당함과 참담함에 비겨, 감동과 기쁨 등의 표현은 한가하고 사치하다. 그걸 깨달아야만 비로소 이산과 상봉의 의미를 올바로 아는 것이라고 본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 깨달음에서 멀리 있는 듯하다. 분단과 이산의 비극, 통일과 재결합의 당위를 떠들지만 실제 의식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은 크게 처진다.
이산가족 상봉에 함께 눈물짓지만, 그 절절한 비극을 모두가 제 것처럼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새삼 놀란 반인륜적 분단이 얼마나 모순되고 부당한 상태인가를 깨닫는 데는 훨씬 더 못 미친다.
들뜬 상봉 마당에 재 뿌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 말도 되지 않는 분단과 이산이 해소되기를 얼마나 진정으로 바라는지, 북쪽 동포와 진심으로 화해하고 감싸안을 자세가 돼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감동적 수사가 넘친 상봉 언저리에 낡고 천박한 인식과 관행이 덕지덕지 헌데처럼 돋보인 탓이다.
광복절 기념식도 따로 치른 야당이 이산가족들을 함께 위로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정치 탓으로 치자. 그러나 ‘잔혹한 드라마’를 화려한 눈물의 상봉극으로 꾸민 것은 보기 민망했다.
북쪽의 고려호텔 집단상봉이 조촐하고 차분한데 비해, 서울 코엑스 상봉장이 원래 용도대로 ‘감동의 전시장’처럼 된 것이 반드시 체제 차이, 우리의 자유로움 때문만인가.
특히 우리 쪽이 예정에 없이 이산가족들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도록 하자고 요구, 첫 상봉을 1시간 넘게 지연시킨 것은 어이가 없었다.
병약한 노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림에 지친 모습은 분노마저 느끼게 했다. 야당의 비판이 아니라도, 이런 ‘전시욕’은 업적을 스스로 욕되게 할 것이다.
남북의 행색을 비교하는 악습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호화 메뉴를 준비하고, 이를 시시콜콜 보도하는 데서 여전히 천박한 과시욕이 엿보인다. 흥분하고 기진한 이산가족들에게 냉면 한 그릇과 진수성찬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심과 후의는 북한 동포를 크게 도와야 할 장래를 위해 아껴두는 게 좋다.
무엇보다 비난할 것은 화해를 가로막는 행태다. 월북자인 북한쪽 방문단장의 자식들이 상봉을 기피한다고 제멋대로 떠들고, 방문단원의 인민군 경력을 탓하는 것 등은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변 환경의 열악함과 북한의 속셈을 탓하고 경계하기 전에, 우리부터 더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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