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셨단 말입니까. 정녕 가셨단 말입니까….”북한의 대표적 서정시인 오영재(63)씨가 16일 어머니 영정 앞에 술한 잔과 함께 ‘무정’등 자작시 세 편을 바치는 순간 남매들과 주위는 일제히 흐느꼈다.
상봉 이틀째인 이날 오전 10시30분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오씨는 형 승재(67·전 한남대 대학원장)씨와 동생 형재(62·서울시립대 교수)·근재(59·홍익대 교수)·창재(56·여)씨와 다시 만났다.
근재씨는 “어제 만나고 또 만나는데도 좋군”이라 했고 창재씨는 “하룻밤 자니까 더 젊어진 것 같아”라고 인삿말을 건넸다. 형제들은 “어제는 간단히 회포를 풀었으니 오늘은 원초적으로 풀자”며 밝은 표정들이었다.
영재씨는 “그동안 생각이 많아 통 잠을 못 이뤘는데 어제는 잘 잤다”면서 “별(형제) 다섯이 모여도 햇볕(어머니)만 못하다”고 말한 뒤 바로 호텔방에서 약식제사를 준비했다.
그는 크리스탈잔을 꺼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환갑때 주신 잔”이라고 소개했고 창가에 돌로 새긴 부모님 영정과 자작시 3편을 놓은 뒤 술을 올렸다.
‘가셨단 말입니까…’로 시작하는 시 ‘무정’을 낭송해내려가자 엎드려 있던 형제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흐느낌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다.
오씨는 “아버지 어머니, 고향이 있는 남녘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둘째 아들이 명복을 빌고자 절을 드렸습니다”라며 “아버지는 청빈한 교육자로 사셨고 어머니는 제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시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먼저 세상을 뜨셨단 말입니까”라고 비통해 했다.
북에서 가져온 ‘돌 영정’은 남한의 어머니가 예전에 북에 보내준 사진을 화강석에 작은 바늘 같은 것으로 정교하게 쪼아 만든 것으로 어머니 독사진에 컴퓨터 합성으로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은 점이 특이하다.
오씨가 올린 시 세 편은 90년 남쪽 신문을 통해 어머니의 생존 사실을 확인한 지 5년만에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추모의 뜻으로 지은 것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장래준기자 rajun@hk.co.kr
■오영재 시 구절마다 '어머니에 대한 정' 절절이
‘통일 되어/ 내 남행길에 오르게 될 그날/ 십리 밖에서부터/ 어머니를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려 했는데…’(‘남쪽 하늘’에서).
북한의 계관시인으로 이번에 ‘남행길’에 나선 오영재씨는 그러나 십리 밖에서 어머니를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가 16일 공개한 7편의 시는 어머니와 생이별한 지 50년 만인 1990년 생사를 확인한 후 편지로나마 사연을 전해오다, 1995년 9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듣고 쓴 사모(思母)의 정으로 흘러 넘친다.
조선대학교 원고지에 또박또박 쓴 시에는 번호가 붙어있다.
‘한 해에 두 살씩 어머니 나이까지 내가 먹겠으니/ 어머니는 더는 늙지 마시라고 시를 써 보냈더니/ 어머니는 편지에 썼습니다/ 네가 건강해야만 가족이 건강하고 또 혈육이 서로 만날 때 건강해야 하니까 한 해에 두 살씩 엄마 나이까지 먹지 말고 네 나이만 먹고 늙지 말아라’(‘사랑’에서).
어머니 나이 대신 먹을테니 만나뵐 때까지 더 늙지 말고 건강하시라는 아들의 기원에, 어머니는 오히려 자식의 건강만을 기원했다는 사연이 눈물겹다.
‘그리워 눈물도 많이 흘리시여서/ 그리워 밤마다 뜬눈으로 새우시여서/ 꿈마다 대전에서 평양까지 오가시느라 몸이 지쳐서…/ 그래서 더 일찍 가시였습니까’(‘슬픔’에서) 라고 오씨는 차라리 아들이 죽은 줄로 생각해버렸다면 어머니의 속고통도 덜하였을 것이라고 애끊는 어조로 말했다.
오씨는 자신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 둘 가기 전에/ 그리움이 가기 전에/ 북남의 겨레들이여/ 통일합시다/ 통일합시다’(‘그리움이 가기 전에’에서)라고 민족이 더 이상 멀리서 그리워만 하지 말고 통일하자고 외쳤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