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에 꿈에도 그리던 북의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끝내 실신하고 말았다. 15일 정선하(95) 할머니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마련된 상봉장으로 북측 상봉단이 들어오는 순간 아들을 발견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조진용(69)씨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서울대법대에 다니던 아들은 6·25 당시 학교에 간다고 나간 후 소식이 없어 집안에서는 죽은 줄 알다 이번 이산가족 명단교환에서 북에 살고 있는것으로 확인됐다.
아들이 테이블로 다가와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정할머니는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조씨가 눈물을 흘리며 컵에 담긴 물을 건네주자 "괜찮아"라고 말한 뒤 더이상 말문을 잇지 못한 채 실신했다.
만을의 사태에 대비해 30여분간 대기하던 119구급대가 긴급조치에 나섰지만 할머니는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아들과 더이상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갔다. 조씨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며 "이 불효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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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세 휠체어 아버지는 말이없어
“아버지, 저 재혁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북에서 50년만에 아버지를 찾아온 임재혁(66)씨는 부친 임휘경(91)옹을 보는 순간 이렇게 목놓아 울부짖었다. 회한과 원망과 고통과 애절함의 눈물이었다. 임씨는 6·25때 의용군으로 징집되면서 헤어진 후 반세기만에 아흔을 넘긴 채 휠체어에 의지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나온 아버지를 만났다.
임옹은 몸 상태가 아주 안 좋고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통곡에 통곡을 거듭하던 재혁씨는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휠체어에서 손을 내밀며 머뭇머뭇하자 다시 “접니다. 저예요. 재혁이에요”라고 외치며 두 팔을 하늘로 쳐든 뒤 눈물 속에 큰 절을 올렸다. 이어 다시 “접니다, 아버지”라고 외치며 또 큰 절을 올렸다.
재혁씨의 울부짖음은 이내 “어머니는 어디 가신 거냐, 어머니는 왜 없느냐”는 항변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그의 모습은 시절에 대한 한과 세월에 대한 원망을 웅변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가족들도 “왜 이제서야 왔느냐”며 울음바다를 이뤘다.
/이진동기자
jad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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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 끓어안은 암투병 86세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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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위암 투병으로 힘겨운 몸을 휠체어에 맡긴 채 50년 전 헤어진 아들 안순환(安舜煥·65)씨를 만난 이덕만(李德萬·86) 할머니는 당초 다짐과는 달리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회한의 눈물만 쏟아냈다.
저만큼 걸어오는 초로의 아들을 단번에 알아는 봤지만 내달려 가 안아주지 못한 한 맺힌 어머니의 마음이 반세기동안 참아온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이 놈아!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전쟁통에 어떻게 살아났니?” 아들에게 물어보리라고 다짐했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흐느낌뿐이었다.
키가 작고 입맛도 까다로워 늘 안타까웠던 아들의 얼굴만 쓰다듬다 겨우 내뱉은 한마디는 “순환아, 아들아!”였다. 안씨는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어머니 제가 순환입니다. 큰아들 순환입니다”라며 50년동안 가슴 속에만 묻어뒀던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렀다. “어머니, 이렇게 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네다.”
순환씨는 그러나 동생 민환(民煥·59)씨로부터 어머니의 병환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 제 탓입니다. 저 때문에 병나셨구만요.” 순환씨는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사무치게 흐느꼈다.
아직 자신의 병명을 모르는 이 할머니는 “나 괜찮아. 너 만나려고 이젠 밥도 많이 먹어”라면서 “이번 네 생일(19일)엔 에미가 미역국 끓여줄 거야”라며 늙은 아들을 어린 아이 달래듯 얼렀다.
“이젠 널 안 보내. 여기서 같이 살자, 순환아.” 이 할머니는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내뱉고는 순환씨의 얼굴을 마냥 쓰다듬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말문터진 치매노인
北아들품에 안겨 울자 기적같이 "종필이"
가슴에 묻힌 한이 풀린 까닭일까. 50년만의 아들 상봉이 치매를 앓던 100세노모의 기억을 기적처럼 되살렸다.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아들을 만나러 온 남측 이산가족 중 최고령자 조원호(趙媛鎬·100·충남 아산시)할머니는 10년째 앓아온 치매 탓에 꿈에도 그리던 아들이 눈 앞에 섰는데도 멍하니 초점잃은 눈길만을 허공에 보낼 뿐이었다.
아들 이종필(69)씨가 안타까워하며 “저를 보시려고 지금까지 살아 계셨군요”하면서 가슴에 꽃을 달아준 뒤 “오마니, 오마니…”를 외쳐대도 조할머니는 “어 어 어 …”라고 할 뿐 입을 뗄 줄 몰랐다.
보다 못한 셋째아들 종덕(63)씨가 “어머니, 형님의 덧니가 기억나지 않으세요”라고 말을 해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곱던 우리 어머니가 치매라니…. 천년만년 정정할 줄 알았는데….” 서러움에 북받친 종필씨가 어머니 품에 안겨 울부짖자 큰딸 종완(66), 막내딸 종혜(57)씨가 “오빠 이름을 엄마에게 불러봐”라고 주문했다.
종덕씨가 귀에 대고 “어머니! 종필이 형이야, 종필이 형”하고 외치는 순간, 마침내 조할머니의 입에서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종필이, 종필이”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에 입대한 뒤로 소식이 끊긴 아들이 이제야 의식 속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동안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아들의 주름진 모습이 생경한지 조할머니는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종필씨는 “오마니, 제가 벌써 70이 다 됐어요. 70이 다됐단 말입니다”라며 어머니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보이지 않는 어머니..."
北계관시인 오영재씨 회환의 눈물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부둥켜안은채 통곡하던 남북의 네 형제는 어느새 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따오기’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북한의 계관시인이 돼 돌아온 둘째 오영재(吳映在·64·사진)씨가 어머니(1997년 작고)를 그리며 불러온 노래였다.
이날 승재(承在·68·한남대 명예교수)·영재·형재(炯在·63·서울시립대 교수)·근재(勤在·60·홍익대 교수)씨 형제는 코엑스 상봉장에서 마주친 순간 마치 어제 헤어진듯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동생들이 빛바랜 옛집 사진을 내보이자 영재씨는 “여기 집 주변 배나무에 열린 배를 내가 다 (종이로) 쌌는데 먹지도 못하고…”라며 회한이 북받치는 듯 눈을 감았다.
영재씨는 곧 “열여섯 어린 나이로 북으로 향할 때 동구밖까지 따라 나오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라며 목을 놓아 울었고 남의 형제들은 “어머니가 ‘영재 볼 낯이 없다’며 평생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고 전하며 함께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전남 강진 국립농업중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50년 7월 의용군에 차출돼 북으로 간 영재씨는 ‘아! 나의 어머니’등 부모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시로 써왔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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