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생이별의 한이 비명에 가까운 절규와 통곡으로 터져나왔다.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에서는 반 백년이라는 세월도, 높기만 하던 분단의 벽도 보이지 않았다. 남북의 이산가족 596명은 헤어지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 무엇도 끊지 못하는 뜨거운 혈육의 정을 확인했다.남측 가족 496명이 먼저 입장했다. 100개의 테이블에 나눠 앉은 이들은 빈 좌석 하나를 채워 줄 가족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50년만큼이나 긴 10분이었다. 오후 4시 30분. 꿈에 그리던 얼굴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환아” 위암으로 전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이덕만(李德萬·87)할머니는 맏아들 안순환(安舜煥·67)씨의 모습에 비틀거리며 휠체어를 딛고 일어섰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운 어머니, 든든했던 맏형, 의용군에 끌려갔던 아들, 잠깐 학교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동생, 한 달 후면 온다던 남편…. 800여평 규모의 코엑스 단체상봉장은 순식간에 눈물 바다가 됐다.
계관시인 오영재(64)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에 볼을 부비며 “어머니, 제가 열 여섯 나이로 떠날 때 동구밭까지 따라 나오시던 모습 그대로이시군요”라고 울부짖었다.
큰 형님 승재(68·한남대 명예교수)씨는 “네가 북으로 간 후 ‘영재가 함께 찍어야 한다’며 평생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고 통곡했다. 홍익대 조형학과장인 넷째 근재(60)씨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막내 창재(57)씨도 영재씨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형님!”만을 되뇔 뿐 말을 잊었다.
‘인민과학자’조주경(68)김일성대학 교수는 반세기만에 어머니 신재순(88·부산 서구 서대신동)씨 품에 안겨 떨어질 줄 몰랐다. 어머니 신씨는 “어미노릇도 제대로 못했는 데 제일 좋은 대학교 교수가 되고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더 바랄 것이 없다”며 염주를 손에 쥔 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조선번역영화제작소 소장이자 북한 최고의 영화더빙 전문성우 박 섭(74)씨는 동생 병련(64)씨를 한참동안 쳐다보다 부둥켜 안고 그제서야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박 섭씨는 부모님과 누나 2명이 모두 사망하고 병련씨 혼자 나왔다는 얘기를 듣자 “오마니, 큰 아들 섭이가 왔습네다”라고 외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동생이 “연극이 끝난 뒤 무대 뒤로 형을 만나러 가 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신향’극단 단원 시절을 회고하자, 박 섭씨는 “그래 맞다, 맞다. 고맙다. 잘 컸구나”며 기뻐했다.
큰아들을 만난 흥분을 진정시키려고 줄곧 눈을 감은채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올리던 박보배(90) 할머니는 아들 강영원(66)씨를 품에 안은채 사투리로 “그동안 에미 없이 어찌 살았으까”라며 통곡했고, 강씨는 처음 보는 조카들에 둘러싸인 채 “어머니 죄송해요 죄송해요.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세요”라고 울먹였다.
17세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던 서시석(67)씨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리던 어머니 김금례(87·충남 공주시)씨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머니 김씨는 잠시 혼절했다 곧 정신을 차리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북에 가지 말고 이대로 같이 살자”며 통곡을 했다.
양한상(69)씨는 어머니 김애란(88)씨가 노환으로 만나러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를 외치다 쓰러져 동생 한종(64)의 부축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권중국(70)씨는 그리던 동생들 앞에서 넋을 잃다시피했다. 8남매중 맏인 권씨는 바로 아래 남동생 중후(62)씨에게 “나 대신 형노릇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미안하다”며 울먹였고, 인원제한으로 넷째(차희·66)와 여섯째(춘례·59) 여동생을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겠느냐”며 주저앉은 채 바닥을 쳤다.
오후 6시. 어느새 상봉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50년의 한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시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그리움의 눈물은 어느새 하루밤을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의 눈물로 변했다.
정녹용기자 ltress@hk.co.kr
■ 단체 상봉
남측 방문단과 북측 가족들의 단체 상봉(집체 상봉)은 15일 오후 5시께부터 숙소인 고려 호텔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북측은 호텔 2층 대형 홀에 우리 방문단 60명을, 3층에 40명을 분산해 북한 가족들과 만나도록 했다.
고려 호텔 상봉장은 반세기 동안 헤어졌던 혈육들이 서로 얼싸안고 단절의 세월을 달래느라 눈물의 바다를 이뤘다. 남측의 어머니와 북측의 아들, 남측의 남편과 북측의 아내. 상봉 가족들은 50여년 동안 참아왔던 이산의 한과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냈다.
살아있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방북 직전 통보 받았던 장이윤(張二允·71)씨는 준식(69) 종관(65) 두 조카의 손을 붙잡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사실이냐”며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오열했다.
1·4후퇴 때 큰 아들만 데리고 남하했던 강기주(姜基周)씨는 차남 아들 경희(京熙·58)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네가 살아있다니,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다오”라며 목이 메었다.
강씨는 10년전 일본 여행 때 자식이 생각나 샀다는 손목시계를 경희씨 손에 채워주며 “대동강변에서 잘가라고 손을 흔들던 모습이 지금도 선한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측 방문단은 오후 7시부터는 인민문화궁전에서 장재언(張在彦) 조선적십자회 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순안공항
이에 앞서 장충식(張忠植)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단장으로한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은 15일 예정보다 1시간 가량 늦은 오후 2시께 고려항공 특별 전세기 IL 62편을 타고 평양에 도착했다.
오후 1시 김포공항을 출발한 고려항공 IL 62편은 북측 방문단을 태우고 남측으로 올 때처럼 서해상을 통한 직항로를 이용, 50여분간 비행한 뒤 평양 순안공항에 안착했다. 남측 방문단이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마중나온 장재언 조선적십사회 위원장이 장총재 일행에게 악수를 건넸고 다른 조선적십자회 관계자 등 북측 인사들도 손을 흔들어 50여년만에 북녘의 가족을 찾은 남측 이산가족들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방문단이 공항건물로 들어 서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 북측 여성들은 “환영합니다”“반갑습니다”를 연발하며 박수를 보냈다.
고려호텔
남측 방문단이 김대 대통령이 6월 13일 방북시 이용했던 길을 따라 평양으로 향하는 도중 평양 시민들은 연도에 몰려나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다.
1985년 준공된 고려호텔은 45층 짜리 쌍둥이 건물로 연건평 8만4,000㎡에 객실 510개를 갖춘 특급호텔. 북한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이 호텔의 옥상 회전 전망식당에서는 평양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평양=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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