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55주년을 열흘 남짓 앞둔 4일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이시카와 호국신사에 높이 12m의 ‘대동아 성전(聖戰) 대비’가 세워졌다.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비명(碑名)에 노골적으로 ‘성전’을 새긴 예는 찾기 어렵다. 건립위원회는 애당초 이 비를 도쿄(東京)의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세울 계획이었다니 더욱 놀랍다.
건립위원회는 시베리아 수용소를 경험한 구관동군 출신의 모임인 ‘삭풍회(朔風會)’가 중심이다. 구관동군 작전참모 출신인 삭풍회의 구사치 데이고(草地貞吾·96)회장은 “태평양 전쟁으로 아시아가 해방됐으니 성전이라는 이름에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15일 오전 11시께 도쿄 번화가인 시부야에서 20여명의 ‘풀씨회’ 할머니들이 침략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평화를 다짐하는 전단을 행인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55년 결성 이래 매년 반복해 온 평화 시위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한 할머니(76)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전쟁이었다”며 “그 원인을 생각하지 않으면 다시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일본 전국에서는 정부의 전몰자 추도식을 비롯한 크고 작은 추도·평화기원 모임이 열렸다. 정부 추도식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표명됐다. 우익·진보단체가 각각 연 별도의 모임에서 전쟁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과 주장이 쏟아져 나온 것도 예년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은 어느 쪽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55년 동안 ‘회색’에 머물러 온 일본의 역사 인식이 세월속에서 아예 하얗게 탈색하는 듯한 아찔함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