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눈물자국밖에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느낌, 서글픈 생각으로 허탈감까지 들었다.” “북한 가족들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라.”1985년 9월 이산(離散) 40년만에 북의 혈육과 처음 극적인 상봉을 했던 ‘이산가족 상봉 선배’들은 상봉 당시와 이후 삶을 되돌아보며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망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이병규(李炳珪·당시 72·98년 사망)씨를 뜻하지 않게 만났던 이재운(李在運·62)변호사는 “전혀 준비를 못해 안타까웠을 뿐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변호사는 주소를 물어보던 아버지에게 ‘가짜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경직된 분위기를 회상하며 안타까워 했다. 2년전 제3국을 통해 아버지의 타계소식을 들었다는 이변호사는 “반드시 주소를 묻고 가족들의 생년월일도 알아둬 평생 한으로 남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사촌누이를 만났던 김동수(金東秀·73·신원기경회장)씨는 “이번 만남은 너무 늦게 이뤄졌다”며 “92년 2차 상봉을 신청했던 70세 이상 노인중 74%가 세상을 떠났으며 10년 뒤에는 이산 1세들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85년과 지금의 상황이 다른 만큼 흥분하지 말고 특히 고령인 노인들은 건강에 주의하라”고 충고했다.
역시 사촌누이를 만났던 이병철(李炳哲·62)씨는 “1회성 행사로 끝나면 이산가족들에게는 오히려 회한만 커질 것”이라며 “그때는 북한이 꽁꽁 닫혀있어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 평양을 밟을 때에도 기쁨보다는 사지(死地)에 들어섰다는 긴장감을 내내 떨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85년 당시 평양을 방문한 이산가족 50명중 혈육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 사람은 35명. 이들은 ‘일평회(一平會)’를 조직해 매년 한두 차례씩 만나 소회를 나누며 친목을 다져왔다. 그동안 지학순(池學淳) 주교, 희극인 김희갑(金喜甲)씨 등 7명이 세상을 떠 현재 회원은 28명으로 줄었다.
/박희정기자 hjpark@hk.co.kr
박천호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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