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은 북한 출신 의사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황국신민화’에 영합한 친일 행각으로 입신한다.광복 후 소련군에 체포되지만, 로스케 장교의 뺨에 난 혹을 자진해 떼주는 영악한 처신으로 살아 남는다. 이어 전쟁중 월남해서는 미 대사관에 교제를 터 아이들을 유학보내는 등 성공한 삶을 산다. 이 60년대 소설을 뒷날 개작했다면, 악덕 병원재벌과 권력 해바라기성 국회의원 등이 그의 이력에 보태졌을 법하다.
■민족사의 격랑을 절묘한 변신으로 헤쳐간 천박한 지식인들을 비웃은 작가는 대학교수로 일관한 선비였다. 외세 침탈과 이념 대치, 독재와 개발연대, 세계화 등 격동을 거치면서 이 사회가 그나마 정체성을 지킨 것은 평범한 삶에서 지조를 지킨 이들이 조용히 버틴 덕이다.
민족과 민주, 통일 등의 가치를 위해 앞장서 투쟁한 큰 인물들의 그늘에는 이런 평범한 선비와 ‘보통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어느 시대나 사회의 진정한 중심이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서 이 중심세력이 갈수록 소외되고 있다. 민주화·진보세력이 권력 주변에서 입신한 것은 좋으나, 합당한 몫을 넘어선다. 별것 아닌 인물들까지 걸맞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만과 독단으로 사회적 이해와 논의를 주무른다.
개인적 영달과 한몫 챙기기에 몰두하는 추한 행태마저 곳곳에서 불거진다. 그 결과 집권세력이 사회 중심세력과 공감과 연대를 넓히지 못한 채, 아직 우세한 보수의 간단없는 공격에 허둥대는 모습이다.
■개혁 정책의 표류, 가닥을 잡지 못하는 ‘반미’논쟁 등이 이를 상징한다. 사회 중심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치권 주변의 거칠고 공허한 주장만 엇갈린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층 거세질 보수 역풍에 밀려, 졸지에 모두 추락할 수 있다.
이기적 목표를 좇는 이들의 운명이야 걱정할 바 아니지만, 개혁과 진보적 실험이 좌절하는 것은 안타깝다. ‘꺼삐딴 리’를 닮은 이들을 솎아내고, 순수한 열정으로 사회 중심세력을 설득해 이념과 정책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시급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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