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현역중 임선동(현대)만큼 파란과 곡절이 많은 선수도 드물다. 휘문고 재학시절 제2의 선동렬로 꼽힐 만큼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LG가 1차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대에 입학한 임선동은 1994년 세계선수권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성가를 높였다.한없이 치솟기만 하던 그의 야구인생은 그러나 95년말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고교시절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동기생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조성민이 일본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데 자극받아 해외진출의 꿈을 키울 무렵이었다.
그해 9월 김충남 당시 연세대감독이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백인천씨에게 조언을 요청한 것이 임선동에게 운명의 갈림길이 됐다. 백씨는 임선동정도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진단했고 일본통인 문용운씨의 주선으로 10월9일 일본 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와 비밀계약을 했다. 그러나 임선동에게 LG라는 암초가 있었다.
LG의 집요한 공작으로 KBO는 일본야구기구에 요청, 임선동의 입단을 불허하도록 했다. 발끈한 임선동은 법정소송까지 벌였다. LG에 입단한후 2년이 지난후 임선동이 원하는 구단으로 이적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임선동의 승리는 한국야구계에 거센 변화를 몰고 와 ‘노비문서’라는 비판을 받았던 신인지명제도가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임선동의 전도는 순탄치 않았다. 96년 아마팀 현대 피닉스에서 뛰다가 97년 울며겨자먹기로 LG유니폼을 입었다. 임단 첫해 11승을 올리며 이름값을 해내는가 했던 임선동은 이듬해 고작 1승을 거뒀다. 99년 임선동은 또한차례 다이에 호크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하지만 계약조건은 95년 계약당시와 너무 달랐다.
2군에서 테스트를 받은 후에야 95년 계약조건을 이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고민끝에 임선동은 일본행을 포기하고 99년 현대로 이적했다. 하지만 형편없는 구위로 1,2군을 들락거리며 주위를 실망시켰다.
올시즌 개막전 임선동은 “올해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며 초조한 기색이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올시즌은 선수생명을 가늠하는 기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벌써 12승이나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다.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던 임선동이 진짜 최고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뒤늦게 뗀 셈이다.
정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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