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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황홀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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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황홀한 만남

입력
2000.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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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웃집에서 화초를 한뿌리 얻어다 심었다. 상사초라고 했다.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꽃도 안피고 잎은 곧 시들어버렸다. 잘못 옮겨심어서 죽었나보다고 생각하고 곧 잊어버렸다. 잊어버리고 있는데 장마중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긴 했지만 영양실조가 역력한 파리한 꽃이 피자마자 장대비를 맞고 쓰러져 못일어나고 말았다.잎도 꽃도 될성부르지 않길래 뿌리도 성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금년봄에 제일 먼저 땅을 뚫고 올라온 게 상사초 잎이었다. 산에 아직 잔설이 남아 있을 때였다. 아직 일년초들은 눈도 트기 전에 수선화를 닮은 싱싱한 잎이 홀로 너울대더니 여름도 되기 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동안에 무성해진 한련 봉숭아 따위에 묻혀서 상사초는 있었던 자리조차 불분명해졌다. 장마 중에 두 개의 꽃대가 십센티미터나 올라온 걸 발견하고서야 아야, 참, 상사초가 여기 있었지 겨우 생각이 났다. 잎이 진 지 두 달은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 꽃대는 하루에 십센티미터씩 자라는 것 같았다. 발견한 지 사나흘 만에 오십센티미터가 넘는 긴 꽃대가 되었고, 꽃대 끝의 꽃봉오리도 여러 송이였다. 분홍도 아닌, 보라도 아닌, 청승맞은 빛깔로, 나리 꽃 모양의 통꽃이 뭐가 그렇게 급한지 무리 지어 한꺼번에 피어난 걸 보니까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뿌리에서 난 잎과 꽃의 서로 만날 수 없음을 왜 옛사람들은 상사(相思)에 비하였을까. 예쁜 이름이라 생각했던 게 잔인한 이름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토종 화초나 야생꽃 이름중에는 예쁜 것도 많지만, 너무 극사실적이어서 잔혹한 것도 꽤 있다.

‘며느리 밥풀’이나 ‘며느리 밑씻개’따위 풀 이름에는 잔혹한 여인애사(女人哀史)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상사초 또한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감정에 대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계와 질투섞인 가학취미가 스며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대는 상사하는 사이의 못만남은 커녕 잠시의 엇갈림조차 불가능한 세상이다. 핸드폰이라는 물건 때문에, 연인들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이르르기 전부터 어디만큼 왔나를 시시각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저러다가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싶게 계속해서 속살거리면서 만날 지점까지 가는 연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게 요즈음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상사초한테 네가 무슨 상사초냐, 너는 이제부터 상극초 아니면 ‘웬수’꽃이나 돼야할 것 같다고 비꼬아 주었다.

며칠 전 시내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간 날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장 상사초에게 이끌렸다. 저만치서 보기에, 산에서 기묘한 새가 한 쌍 날아와 내 집 마당에서 잠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조심 다가가니 상사초였다. 마침 온종일 내리던 비가 개고 중천에 상현달이 걸려 있었다. 그 청순하고도 요염한 달빛은 저절로 달의 절정은 만월이 아니라 상현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분홍도 아닌, 보라도 아닌 상사초 꽃이, 얼굴 씻고 나온 반달빛을 만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요하게 빛났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상사초의 꽤 진한 그러나 야하지 않은 향기까지 맡을 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상사초가 피어난 건 저 달빛을 만나고자함이었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과 꽃이 각각 자신의 최고의 순간을 던져 저리도 황홀하게 교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또한 그것들의 그런 순간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여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박완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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