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은 은둔의 땅이다.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명나라로 출병하다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왕조를 세우자, 망국의 유신들은 만수산 서남쪽 골짜기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진다.그들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에 당황한 이성계는 높은 벼슬을 미끼로 회유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을에 불을 놓아 그들을 불러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불에 타죽고 말았다. 문신 72명과 무신 48명이었다. 그 뒤 남은 유신들은 강원도 정선땅으로 숨어 들었다.
■이성계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겨버리자 개성 사람들의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면서 되질을 할 때도 왼손으로 되를 잡고 거꾸로 부었고, 한양에 올라간다는 말 대신 내려간다는 표현을 썼다.
이 나라의 정신적 서울은 아직 개성이라는 자부심이었다.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 부르는 것도 500년 왕조를 빼앗은 쿠데타에 대한 반감이었다. 대나무칼로 가래떡 허리를 눌러 끓인 조랭이 떡국 만들기도 이성계 목 자르기라 한다.
■조선왕조의 출사(出仕)를 거부하는 것은 저항의 기본이었다. 벼슬을 포기한 선비의 할 일이 상업말고 무엇이겠는가. 그 고장 상인이 일찍부터 명성을 얻은 이유를 알만하다. 경우 바르고 도리에 밝은 송도상인(松商)들은 돈을 벌어 옳게 쓰는 일에도 모범이었다.
특히 고려영약 인삼 재배와 거래로 얻은 막대한 이익을 독립군 군자금 지원이나 장학금에 쓴 일은 유명하다. 일본상인들이 그 땅에 발을 못붙이게 한 것도 칼같은 송상기질이었다.
■그 도시를 품고 있는 송악이 보인다는 기사를 썼다가 기관에 붙잡혀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남산 서울타워 공사가 한창이던 70년대 윈치를 타고 올라가 스케치한 기사였는데, 송악이 보인다는 제목을 붙인 것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올 가을부터 그 땅에 버스를 타고 가게 된다 한다. 관광뿐 아니라, 경제특구로 개발되어 우리 기업의 공단도 들어선다는 발표다. 자유로나 통일로를 타면 1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북한의 최전방으로 더욱 꽁꽁 숨었던 은둔의 땅이 얼굴을 내밀다니….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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