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계신 모든 분께 과일 값이 너무나 싸고 안팔려 참담한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못난 저를) 도와주시는 마음으로 과일을 팔아주세요.” 지난 달 집으로 날아든 한 ‘호소문’은 이같이 시작하고 있다.경북 청송군 파천면의 윤모씨가 보낸 이 글은 “과일 값이 싸면 싼대로 팔리면 괜찮은데 싸도 팔리지 않아 할 수 없이 과일을 팔기 위해 이 호소문을 씁니다. 과일을 주문하시면 비용은 제가 부담해 택배로 보내드리며 과일 값은 잡수신 다음 1개월 후에 주시면 됩니다.
지금 사과·배를 못팔면 앞으로 날씨가 더워 과일은 모두 상합니다. 썩는 것 보다는 외상으로라도 팔아야 되는 것이 저의 다급한 심정입니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과·배·토마토 가격과 함께 주문은 밤 12시까지 받는다며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명시하고 있다. 읍소형 상술이라고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 사연이 절박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집으로 마늘이 배달됐다. 농림부장관이 보낸 것이다. 정부는 마늘 농가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마늘 소비 촉진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홍보의 일환으로 마늘을 보내는 것이라고 장관은 밝혔다.
그는 “현재 농가의 3분의 1인 전국 42만호 농민들이 (마늘을) 재배하고 있으며 쌀 다음으로 중요한 소득원입니다. 중국산 수입파동으로 현재 ㎏당 1,200원을 밑돌고 있어 농정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한마디로 평소보다 마늘을 더 많이 먹자는 것이다.
“채권펀드 조성에 금융권의 참여를 요청한 것은 시장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도덕적 권유’다. 외환위기 직후 뉴욕 연방은행 총재도 뉴욕의 주요 은행을 한 곳에 모아 ‘도덕적 권유’를 했다. 그래서 한국의 외채협상이 타결될 수 있었다.” 얼마전 한국 정부와의 마지막 정책협의 결과를 발표한 데이비드 코 IMF 서울사무소장은 한국의 관치금융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농산물 가격 하락에 따른 농민들의 피해를 덜어주기 위해 농산물을 더 많이 소비하자는 것은 결국 소비자들에 대한 ‘도덕적 권유’인 셈이다. 이같은 ‘권유’는 당장 심정적 호응을 얻을 수는 있어도 그 효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수입개방으로 물밀듯 몰려오는 외국산 농산물을 ‘신토불이(身土不二)’를 내세워 언제까지나 막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권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정부의 정책 잘못이나 ‘도덕적 해이’를 국민들에게 슬그머니 떠넘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일 현대자동차나 삼성반도체가 어떤 이유에서건 수출이 안되는 경우 우리 국민은 자동차나 컴퓨터를 더 사야 되는 것일까.
이번 마늘분쟁은 앞으로 전개될 중국과의 무역분규의 서곡에 불과하다고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각국과의 농산물 분야 분쟁이 더 격화할 전망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상징성이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됐는지 철저한 분석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그냥 넘어가 버렸다. 통상교섭상 문제가 있었는지,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에 원인이 있었는지 따져봤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백서라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제2, 3의 마늘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고, 또 분쟁이 발생해도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중국측의 비합리적인 행동만을 성토하는 비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았을 뿐이다. 국내산 과일 값 하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값 싸고 이색적인 외국산 과일이 소비자 입맛을 빼앗고 있는데도 풍작에 소비감소 때문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개방된 작은 규모인 우리 경제는 외부 움직짐에 큰 영향을 받고, 때로는 우리 의사와 어긋나는 행동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농·축산물이 대표적 분야중의 하나다. 정부는 외부 환경만을 탓하면서 ‘도덕적 해이’에 빠질 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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