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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준칼럼] 晩年의 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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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준칼럼] 晩年의 두 모습

입력
2000.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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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장님, 요즘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시겠습니까. 온 정열을 쏟아 세운 기업이 휘청거리고 있고, 그로 인해 그룹 전체가 풍파에 휩싸이고, 우애 두텁던 자식들마저 서로 등을 돌리고 재산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요.필생의 사업인 남북경협에 새로운 전기가 열리고 있는 터에 그룹의 존립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오죽 가슴이 타시겠습니까. 입원하신 것도 현대를 둘러싼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회장께서 좀더 일찍 과감한 결단을 내리셨다면 이런 위기는 맞지 않았을텐데 하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재벌총수들의 만년을 보내는 두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수년 전 미련없이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코오롱의 이동찬 명예회장(79)과 LG의 구자경 명예회장(77)의 근황을 볼까요. 두 분 모두 한창 활동할 나이에 2세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유유자적의 길을 택했습니다.

평소 그림을 그리며 한유(閑遊)를 즐기던 이 명예회장은 1996년 초 “아들이 40이 되었으니 기업을 물려줘도 된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영권을 이웅열 회장에게 넘긴 뒤 등산, 낚시, 그림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히말라야 등반에 나서 해발 5,000m 고봉까지 오르는 열정을 보였고 지금도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아들에겐 회사 일은 일체 보고하지 말라고 해 이회장은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한답니다.

이 명예회장보다 1년 앞서 구본무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구 명예회장은 꽃꽂이 등의 농업관련 분야에 취미를 붙여 주말이면 동호인을 위해 강의를 할만큼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특히 난과 버섯 재배에는 전문가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룹 일은 일체 간섭하지 않고 매주 한번 LG복지재단과 문화재단의 일만 챙기고 일주일에 두어 번 골프를 즐긴다고 합니다. 나머지 시간은 연암축산학원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다니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제 왕회장과 성향이 비슷한 분들의 근황을 살펴보지요. 그룹 일을 모두 혼자 도맡아 처리하다 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겪은 김우중 회장은 심장병을 치료하느라 외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왕회장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오늘날의 기업 토대를 마련한 한진의 조중훈 회장은 후발 항공업체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자식들을 감옥에 보내는 고초까지 겪었습니다. 황제경영을 고집하고 있는 롯데의 신격호 회장 역시 노사문제 등 안팎에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왕회장님 당신은 어떻습니까. 2세들에게 경영권을 완전히 넘겨주지 못하고 원격관리해온 게 사실입니다. 물론 2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을 해온 것을 국민들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맨 모래땅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세운 것이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은 것은 물론 당장의 적자를 무릅쓰고 금강산관광이라는 미래에 대비한 투자를 결정하고 남북정상회담의 초석을 놓는 큰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몇몇 계열사 문제로 현대는 물론 한국경제 전체가 위협받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85세의 왕회장께서 현대그룹을 지휘한다는 사실은 누구로부터도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왕회장의 결정에 두려움을 갖고 따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을 이용하려고만 드는 사람만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더이상 영향력이 쇠진하기 전에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엄정하고도 단호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래서 자식들간의 우애를 끊지 않으면서 현대의 명예와 한국기업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과연 왕회장답다’는 소리를 들으며 한유를 즐기는 만년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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