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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장관님, 말씀은 지당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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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장관님, 말씀은 지당합니다만‥

입력
2000.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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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문제긴 문제인 모양이다. 오죽하면 월권이라는 소리를 각오하면서까지 문화관광부 장관이 방송 문화를 고쳐 놓겠다고 천명하고 나섰을까. 그것도 장관직을 걸고서 말이다. 장관의 각오는 상당한 호응을 얻는 듯하다.시민사회 단체들도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다. 자녀들 걱정으로 여념없는 일반 시청자들도 박수를 보내는 듯하다. 이번 여름의 몇몇 프로그램들이 ‘막 갔다’고 생각하는 방송계 내부에서도 한 번쯤 제동은 있었어야 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언론들도 장관이 방송위원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표시하긴 하지만 대체로 장관의 문제 설정에는 동의를 하고 있다. 장관의 지적과 각오에 그 같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우리 방송이 문제긴 문제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소신에 찬 천명과 우레같은 박수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우리 방송은 그 같은 일들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의 중병의 앓고 있기 때문이다.

장관은 우연히 딸과 함께 본 텔레비전 장면에서 당혹감을 느껴 이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방송의 병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왔고 손쓸 길이 없을 정도로 깊어져 있다.

방송은 IMF통치 경제라는 그림자 속에서 잠깐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숙하는 짬을 가져 보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화려해지고 끈적끈적해졌고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방송에서 자성 검소 건강의 냄새를 맡을 순 없다.

다시 IMF이전의 수준 아니 그 보다 더욱 화려하고 번잡스러운 장면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나마 어렵사리 맞이한 치유의 순간을 그렇게 덧없이 흘려 보내고 병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장관은 방송의 깊은 병을 오래 전부터 알면서도 지금 얘기한 것은 아닐까. 지금에서야 그 각오를 전달해야할 만한 ‘계면쩍은 일’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방송 곳곳 요직에 있는 이들은 화를 내며 펄쩍 뛸 일이겠지만 현재 우리 방송계는 비전문성이 판을 치고 있다.정치 논리 탓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인사들이 정치 논리를 등에 업고 방송 곳곳에 포진해 비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 장관이 걱정하는 방송의 내용보다 더 선정적이며 폭력적일 정도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비전문성의 책임이 장관에게만 오롯이 가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만 장관직을 걸고서라도 막아냈어야 하는 사안이었음에 틀림없다. 장관이 늦게서야 그 계면쩍음을 털고 방송의 문제를 제기하고 문화를 걱정한 일은 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책될 것 같지는 않다.

장관이 장관직을 방송 내용 정화에 내걸 것이 아니라 정치 논리를 등에 업은 방송 곳곳의 비전문성 청산에 내걸면 어떨까. 방송 내용 정화에 장관직을 내건 것은 아무래도 오조준인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방송에 대한 장관의 의견 표명은 방송위원회를 움직이게 하고, 또 각 방송사 사장들을 움직이게 하는 등의 효과를 볼 것이다. 방송사 사장들은 일선 프로듀서들을 혼쭐낼 것이 뻔하고 프로듀서들은 잠깐 움추려드는 포즈를 취할 것이다.

몇 개월간은 ‘바른 생활’에 가까운 조용한 방송을 접할 것에 틀림없다. 정치 논리로만 무장되고 비전문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성취해낼 최대한의 성과는 거기까지다. 철학없는 방송, 비전없는 방송의 근원은 정치 논리, 비전문성 탓일 수 밖에 없다.

장관직을 내걸고 싸웠어야 했고, 또 싸워야 하는 지점은 방송의 근간과 관련된 것들이지 그 근간으로부터 비롯되는 잔 가지들은 아님이 분명해졌다. 늦었지만 정조준이 필요하다.

/원용진·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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