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제작국 사무실 아침은 하얀 종이 한 장과 함께 시작된다. 출근하자마자 제작진의 눈길은 본능적으로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 한 장에 쏠린다. 이 종이 한 장이 PD를 비롯한 제작진의 아침 기분을 좌우할뿐만 아니라 능력의 판정 기준이 돼 인사이동 등 신상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바로 일일 프로그램별 시청률표다. 시청률표에 대한 반응은 수치만큼이나 다양하다. 만면에 웃음을 띠는 연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 얼굴이 일그러지는 간부…. 당일 인터넷 통신이나 신문에 보도된 선정성 비판이나 작품성의 찬사는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희비 쌍곡선의 유일한 기준은 바로 이 종이다.
시청률이 저조한 PD는 분을 삭이기도 전에 책임연출자, 국장에게 호출된다. 불호령이 떨어지고 대책 마련 지시를 받는다. 국장 방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비아냥들. “너 예술하냐?” “프로그램에 약 좀 쳐봐!”
이쯤 되면 제작진에게 방송의 공익성과 방송을 통한 사회 기여라는 사명감은 사전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박제돼 버린 문구로 전락한다. “좋은 프로그램이 밥 먹여주냐”는 PD들의 자조 섞인 한숨이 그래서 터져 나온다.
저조한 시청률표가 아침마다 날라오고 조금 지나 프로그램 폐지설이 나돌면 연출자의 의식과 상식은 서서히 마비된다. 이윽고 “벗겨볼까, 아니면 죽여볼까, 아니면 베껴볼까”하는 불온한 유혹이 밀어닥친다. “그 놈의 시청률이 뭐길래.”
시청률은 시청자가 만든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뭐해? 시청자들이 봐주지 않는데.” 불만에 쌓인 한 PD의 자조다.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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