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이 무엇이고 지는 것은 무엇인가.’ 끝없이 정상을 추구하는 승부의 달인들도 이따금씩 수도승처럼 선문답에 젖어들곤 한다.특히 골프는 살아서 움직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자연속에서 한번의 착각, 한번의 사소한 계산착오로 손안에 든 승리를 연기처럼 날려보내야 하는 스포츠. 더욱이 무욕 무심의 자세와 탐욕 위선의 유혹이 끝없이 요동치며 충돌하는 갈등속에서 ‘자신과의 전쟁’을 치뤄야하는 멘탈게임이기에 격전이 끝나면 허탈감은 더더욱 마음을 적신다.
지난 달 30일 부경오픈에서 우승, 국내 프로골프투어 최다연승 타이기록인 3연승을 달성한 최광수(40·코오롱 엘로드)프로. 올해로 프로 12년차, 구력 22년째이지만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샷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는 승부사의 표정은 진한 고독의 그림자가 다승왕으로 나선 기쁨을 덮고 있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최광수 시대’를 활짝 연 그를 만나봤다.
_흔히들 어제 잘 맞다가 오늘 안맞는 것이 골프의 묘한 특성이라고들 합니다. 올 상반기의 마지막 2개 대회(현대모터마스터스, 포카리스웨트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하반기 첫 대회인 부경오픈까지 6주간의 공백기가 있었는데도 절정의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 입니다. 여유있는 행동은 자신감과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동반하게 됩니다. 설사 OB가 나거나 3퍼팅을 하더라도 다음 홀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죠. 보기했다고 땅을 쳐다보면 주저앉고 싶거나 클럽으로 땅을 치고 싶은 마음밖에 안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경기중 상황이 나쁠 때는 하늘을 가끔씩 바라보면서 구름의 모양도 느끼고 풍경도 감상합니다. 물론 끊임없는 훈련이 전제돼야 합니다. 저 역시 지난 해까지만 해도 항상 쫓기는 심정으로 대회를 치뤘습니다.”
_그렇다면 올해들어 갑자기 이같은 여유가 생겨났습니까. 강욱순프로도 사석에서 최프로의 여유있는 행동이 눈에 확 띌 정도라며 부러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멘탈게임인 골프에서 여유를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물론 올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12년째 전속 계약사인 코오롱 계열의 우정힐스CC(충남 목천면)에서 쭉 연습을 해오고 있는데 초창기시절 신현구 코오롱개발 부사장님이 당시 이곳의 본부장으로 재임할 때였습니다. 신부사장님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셨는 지 틈만나면 저에게 심리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면 골프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만큼 갤러리들 앞에서 한타한타에 희비를 나타내지 말라며 흥분과 낙담에 따른 정신적인 변화가 경기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상세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기에다 5년전 최상호선배님이 지도해 준 집중력 훈련이 보태져 올해들어 효과가 나타나면서 저의 연승행진이 이뤄졌다고 봅니다.”
_부경오픈 우승후 최상호프로에게 제일 먼저 감사한 걸로 들었습니다. 최프로에게서 사사받은 집중력 훈련방식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줄 수 있습니까. 일반 골퍼들에게도 많은 보탬이 될 것 같은데요.
“최선배님은 ‘운동선수는 체력도 중요하지만 집중력이 가장 큰 관건이다. 특히 골프는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아무리 좋은 체격과 체력도 무용지물이다’며 지도해 주셨습니다. 훈련방식은 예를 들어 산에 갈 경우 일정한 거리를 정한 뒤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가는 것 입니다. 처음에는 50㎙를 하다가 점차 거리를 늘려 갑니다.
견디기 힘들면 손가락으로 눈을 뜨게해서라도 참아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뜬 채로 일정 시간동안 명상에 잠기는 것도 좋습니다. 숙달이 되면 달리기를 할 때 휙휙 지나가는 물체들도 상세하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대회가 끝날 때마다 녹초가 될 정도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집중이 됩니다. 저는 지금 코스의 300㎙지점에 떨어져 있는 나무의 점까지 볼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며 10분정도는 눈을 한번도 깜빡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심적으로 여유도 생기더군요.”
_올들어 좋은 성적에 걸맞게 18홀(10언더파) 36홀(15언더파) 54홀(18언더파) 72홀(19언더파) 국내 최소타 신기록 또는 타이기록을 수립하는 신들린 샷을 보였는데요.
저는 일주일에 기본적으로 5일은 우정힐스에서 혼자 또는 연습생들과 함께 9홀을 천천히 돌면서 각종 험난한 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을 합니다. 어떤 때는 벙커에서만 500개의 볼을 칠 때도 있고 그린미스에 대비해 1퍼팅으로 끝내기 위한 어프로치샷에 집중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벙커샷에는 창피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6년전 한국오픈때 입니다.
정확한 홀은 기억이 나지않지만 당시 벙커샷을 하려고 방향을 살피는데 정면에서 관람하시던 이동찬 (코오롱)명예회장님이 눈에 확 띄였습니다. 그래서 멋진 샷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타구를 했는데 토핑이 나 결국 더블보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이후 실력이 따라주지 않으면서 폼만 잰데 대한 후회를 거듭하며 훈련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_최프로는 눈매가 대단히 날카롭습니다. 별명(독사)에 대한 이미지와 어우러져 승부사 특유의 냉정한 인상을 풍깁니다. 별명은 언제 어떤 계기로 붙여졌는지요.
“제가 말수가 적고 잘 웃지도 않는 편이어서인지 차갑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독사라는 별명은 현대모터마스터스를 우승한 뒤 매스컴에서 붙여준 것인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나쁜 의미를 담고있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때문에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_이제 최프로도 불혹의 나이입니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시련이 있었다면 무었입니까.
“95,96년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많은 훈련을 했습니다. 그런데 97년 늦겨울에 조깅을 하다가 왼쪽 발목이 심하게 겹질리면서 인대가 나갔습니다. 순간 ‘이제는 골프인생이 끝났구나’하는 생각에 넘어진 상태에서 10분간을 펑펑 울었습니다.
2개월 뒤 97캠브리지오픈이 열렸는데 좌절만 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깁스를 깨고 압박붕대를 칭칭 감은 뒤 다리를 절뚝거리며 참가했습니다. 성적은 47위에 그쳤지만 가능성을 찾은데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_골프를 흔히 인생사에 비유합니다. 골프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봅니까.
“다시 태어나도 골프를 하고 싶습니다. 골프는 항상 도전의식을 불어넣어 줍니다. 언제나 자신의 스코어에 만족하는 골퍼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의 지루한 반복이 아닌, 매 대회때마다 다른 환경에서 또다른 플레이를 펼쳐야 하기때문에 항상 새로운 기분을 갖게 합니다. 특히 저는 시골출신(전남 구례)이라 그런 지 자연과 더불어 아침 이슬을 밟고 풀내음을 맡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