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학기행](36)강석경의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학기행](36)강석경의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

입력
2000.08.02 00:00
0 0

'마음의 계단' 내려가면 삶의 근원이 보일까경주(慶州)여행은 근대화의 산물이다. 정통성에 목마른 군사정권은 안압지를 복원해서 그 목마름을 해소하려 했다.

처음으로, 혹은 두 번이나 세 번째로 기차를 타보는 아이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경주행 기차를 탔다.

관광버스 혹은 열차를 타고 가는 건조한 다섯 시간, 젓가락 댈 곳 없는 식사, 그리고 몇 개의 능과 석굴암…. 수학여행지 경주는 그 장소가 아니라 잠시나마 학교 생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느낌만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곳은 굳이 경주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속초라도, 부산이라도, 경주만 못할 이유는 없었다. 수학여행이 아니라 신혼여행이라면 굳이 경주여야 할 이유는 더더욱 희박해진다.

7월 뙤약볕에 대능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좋았을 지 모른다는 식이다.

몇 대의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관광객이나 가족 단위의 행락객은 ‘행락’을 즐기기에는 다소 무더운 날씨에 마치 의무이듯 잰 걸음으로 유적지를 스쳐간다.

‘경주의 유적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답사 전에 유적지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전문가의 안내 도움이 필요하실 경우, 본원으로 연락 주시면 친절히 안내를 해 드립니다’.

신라문화진흥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마지막에 이런 문구를 적어 두었다. 눈으로 보는 유적은 권태롭고, 마음으로 보기엔 길이 멀다.

삼국통일 전후에 조성돼 674년(문무왕 14년)에 완공되었다는 안압지(雁鴨池),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계림(桂林). 엄청난 유물과 설화를 마치 소가 젖을 짜내듯 흥건히 쏟아낸 유적지는 그러나 우리 삶에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쩌면 야트막한 구릉을 닮은 경주의 소박한 능이 그런 권태로움을 유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철 한 구간에 걸쳐 있는 일본의 거대한 고분과 달리 경주의 능은 이지러진 산모양으로 한 때 살았던 자의 무덤이라는 인상을 풍길 뿐이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삶에서 ‘그들’의 유적지란.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유적 발굴이란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일 수도 있다.

죽은 자들의 기록인 유물 발굴을 위해 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죽은 자의 보물을 탐하려는 욕심은 이미 많은 산 자들을 죽음의 공간으로 떠밀어 넣었다.

일제 시대에는 도굴을 위해 작은 구멍을 파고 조그만 아이를 들여 보내 유물을 꺼낸 뒤 아이를 가두고 굴을 막아 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미 경주의 수많은 무덤은 산 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능욕 당했다.

유적지 발굴 현장은 현장에 근접하는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것을 빼고는 흡사 공사장과 비슷하다.

비닐 끝으로 쳐 놓은 사방형 공간은 인부들의 움직임이 나른하다. 7월 무더위를 가리는 데는 모자에 얹은 수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유적은 언제나 교묘히 흔적을 남기면서 지친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다. 땅을 한 60㎝만 파고 들어가도 수백, 수천년 묵은 유적지가 드러난다.

왕경유적 발굴터엔 도로며, 다리며, 집단 주택지의 윤곽이 드러난다. 87년부터 13년간, 그들은 땅 속 암호를 풀어내기 위해 단서를 조금씩 흘리는 유물들에 홀린 듯 작업해 왔다.

인류학자는 인류의 과거를 제 꿈의 뒤뜰로 삼고 홀로 거니는 사람이라 했던가. 1,000년 전의 꿈은 100년 전의 그것이나 100시간 전의 그것과 같은 것일까.

사람살이의 면면을 보면 그것이 꼭 그런 것만 같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의 주인공인 젊은 고고학자 강주에게 인류학은 무엇인가.

목곽분을 뒤지는 동안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던 아이가 목숨을 잃는 동료를 보아야 하는 것이고, 결혼식날 죽음을 맞이하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사촌동생인 강희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마치 윤회하듯 그녀의 뱃속에 아이 하나를 남긴 채. 첩실인 어머니를 둔 연극 연출가 강희, 도서관 사서 소정은 ‘도대체 사랑이란 없다’는 믿음을 운명처럼 대물림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갈수록 희박해져가고, 우리 삶의 지표는 나날이 흔들릴 때 조용히 마음 속의 깊은 계단을 밟고 내려가 보자.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침잠의 그 공간에서 윤회(輪廻)하는 업(業)으로 가득한 우리 인생을 목도할 수 있다. 유물발굴 현장은 저만치 있는 계단 중의 하나이다.

▥ 강석경(姜石景) 연혁

▲1951년 대구 출생

▲이화여대 미대 조소과 졸업

▲1974년 ‘문학사상’에 단편 ‘根’ ‘오픈 게임’으로 데뷔

▲‘숲속의 방’(1986년)으로 녹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장편 ‘순례자의 노래’(1981), ‘가까운 골짜기’(1989), ‘모든 별은 다, 라사에 뜬다’(1996) ‘내 안의 깊은 계단’(1999), 작품집 ‘밤과 요람’(1983)

▲기행문 ‘인도기행’(1990)

▲장편 동화 ‘인도로 간 도또’(1996)

경주=박은주기자

jupe@hk.co.kr

■강석경의 요즘

1990년대 이른바 운동권 소설이 잇달아 나오기 전, 강석경의 ‘숲속의 방’은 80년대 신열 같은 시대를 산 운동권 여학생을 다룬 소설 중 가장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경주서 에세이·장편 준비중

80년대 사람들은 그들의 지적인 능력을 입증하려는 듯, 그리고 ‘운동하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입증하듯 ‘숲속의 방’을 읽었다.

그러나 ‘숲속의 방’의 주인공 소양의 죽음을 두고는 문학적 논쟁도 적지 않았다.

그녀는 과연 왜곡된 시대에 질식사한 우리의 여학생이었을까, 자기애에 집착한 소녀적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 사회부적응자였을까.

작가는 86년 책이 출간됐을 때 “소양의 죽음을 통해 내 청춘의 분신을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후로 14년. “어느 죽음도 사회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다.” 작가의 생각은 여전하다.

강석경은 드물게 사회의 테두리를 느끼는 자아의 실체를 좇는 여성작가이다.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요즘 여성 작가들의 작품 경향은 박경리, 박완서의 소설적 업적을 존중하는 그에게는 다소 불만스러운 현상이다.

80년대말, 그리고 90년대 초 두번의 인도 여행으로 그는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삶의 무게를 털어내는 방법을 배웠다.

“미대를 나와 우연히 들어선 작가의 길, 우연한 삶 속에 빠져드는 나 자신이 싫었다. 문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몸부림 칠수록 거듭 빠져드는 수렁처럼 문학은 언제나 작가들의 몸과 마음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는 마음이 가벼워져 돌아왔다. 누구나 얘기하는 ‘무욕의 삶’은 그에게 작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 버리게 했다.

“진짜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저 머리 속에 들어찬 생각을 비워낸다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 생각할 뿐이죠.”

과작인 그는 지난해 장편 출간 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능으로 가는 길(가제)’을 준비중이다.

경주 남산의 삼릉, 헌강왕릉, 선덕여왕릉, 진덕여왕릉, 서악고분군 등을 12단락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에세이 형식이지만 능에 관한 한 사학자들과 함께 다니며 듣고 배운 얘기에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그저 한바퀴 둘러 보아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유적지로 대중을 안내하는 인문학적 지침서이다.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도 준비 중이다. 경주로 터전을 옮긴 지 6년, ‘삶의 근원이 있는’ 경주에 흠뻑 빠진 그를 따라 능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아 보인다. 늦은 가을 쯤 책이 나온다.

박은주기자

■유적지 작업반장 정종율씨

"도기 하나를 봐도 이젠 感이 와요"

“설령 금덩어리가 나온다 해도 딴 맘 먹어서는 안되는 게 이 일이지요. 큰일 나요.”

수백, 수천년 간 땅 속에 묻혀 있던 유적들은 쉽사리 그 몸피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의 유적들은 어느 때는 쉽게, 너무나 쉽게 제 몸을 드러내 오히려 크게 상처를 입는다. 땅을 파고, 호미질하고 곡괭이질 해서 문화재 연구원들의 일을 덜어주는 작업 인부들은 여느 작업장의 인부들과는 대접이 다르다.

황룡사지 동편 신라시대 도시유적 발굴터에서 작업반장을 맡고 있는 정종율(64)씨는 1986년 완결된 안압지 유적발굴은 물론 반월성, 황오동 유물 발굴 작업장에서 일해온 베테랑이다.

“반장 일이라는 게 별거 아니예요. 여기선 호맹이질(호미질) 하나를 해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거 함부로 하는 사람들 가르치고 그러는거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들의 작업은 공무원 근무 시간에 따른다.

12월부터 3월까지는 작업을 하지 못한다. 땅이 굳어 발굴이 어렵기 때문. 장마철에 쉬고, 날이 너무 무더워도 쉬고, 일년에 한 200일 가량 일한다.

일당은 얼마나 받느냐고 묻자 “많이 받습니다”고만 한다. 경주 지역에는 유적지 작업만 하는 일꾼이 줄잡아 200~300명은 넘는다.

흔한 ‘노가다’처럼 생각되지만 정씨는 두 일이 사뭇 다르다. “이 일은 머리를 많이 써요. 피곤한 건 별로 없어요.” 이젠 웬만큼 이력이 붙어 도기 하나를 봐도 이건 그저 나오는 거다, 이건 뭔가 얘기가 되겠다 싶은 감(感)이 온다.

물론 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다. 도기를 깨서 다른 유물을 파내는 데 쓰기도 하고, 밟아서 혹은 곡괭이질 하다 실수로도 많이 깨 ‘선생님들’에게 혼도 많이 났다.

그 예전엔 토기 같은 출토품을 팔아 “엿도 바꾸고 술도 받아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요새는 사정이 다르다.

10여 명의 인부들과 작업을 마친 그는 몸에 묻은 흙만 대충 털고 난 후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떠난다.

박은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